<5272> 제99화 격동의 시절 검사27년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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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993년 4월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었지만 수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넓지 않아 앞날이 걱정됐다. 다행히 친지들과 후배들의 도움으로 몇몇 회사와 정부기관의 고문 변호사 자리를 얻었다. 그 수입만으로도 사무실 운영비는 충분했기 때문에 품위있는 변호사 생활을 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변호사 활동은 성업이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정부가 때마침 벌인 사정활동의 여파였다.
강신욱(姜信旭·현 대법관)서울지검 2차장이 "선배님이 변호사 하시는 걸 보고는 후배 검사들이 자기들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들을 하고 있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활발한 사정활동 덕분에 나는 상당한 사건들을 맡았고 당초 마음 먹었던 대로 사건을 선별해 수임할 수 있었다. 진행 중인 사건이라도 의뢰인이 자꾸 괴롭히거나 흡족하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면 두말없이 수임료를 반환해 주었다.
고문변호사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고(故)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이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현대그룹 주요 간부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고 있었다. 鄭회장 자신도 대통령선거법 위반과 비자금 문제로 형사입건이 된 상황이었다.
하루는 고시 동기인 이종순 변호사가 "鄭명예회장이 金변호사를 만나자고 하니 같이 가보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 때 李변호사는 현대그룹 고문변호사였다.
李변호사와 함께 계동 현대사옥으로 갔다. 鄭회장 방에서 차를 마신 뒤 구내식당에서 점심도 함께 했다. 재벌회장의 오찬이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식사와 다를 바 없고 구내식당에서도 특별히 신경 쓴 것 같지도 않았다.
초면인데도 鄭회장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상당히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역시 소탈한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며칠 후 자신이 검찰에 소환된다는 사실과 아들 정몽준(鄭夢準)씨가 입건된 내용 등을 주로 화제에 올리면서 "앞으로 金검사장께서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 했다.
다만 李변호사에 대해서는 자기 회사의 고문변호사라 그런지 마치 부하를 다루듯이 하고 어떤 때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돌아오면서 李변호사에게 그 점을 지적했더니 "나이 많은 분인데 어떻게 하느냐. 그리고 鄭회장은 금방 누그러지는 성격"이라고 오히려 鄭회장을 두둔했다. 순간 "나는 변호사로서 아직 멀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李변호사가 오히려 존경스러웠다.
그 때 이미 鄭회장의 변호인이 여러 명 있어 나는 특별한 역할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대측으로부터 "鄭회장께서 저녁을 같이 하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속 장소는 옛날에 한 번 가보았던 '오진암'이라는 요정이었다.
저녁 자리에는 내가 아는 변호사들이 7~8명 와 있고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 등 현대그룹 간부 2~3명이 와 있었다.
술이 취하기 전 鄭회장이 현대 간부들에게 "이 중에서 우리가 고문 변호사로 모시지 않은 분이 몇 분이나 되는가"라고 물었다. 간부 한 명이 나와 또 다른 한 사람만 고문 변호사가 아니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鄭회장은 "큰 회사의 고문으로 위촉해 모셔라"하고 그 자리에서 지시했다.
그 날 모두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을 먹고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불러 늦은 시간에 자리가 끝났다. 鄭회장은 노래도 좋아할 뿐더러 자리가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갔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등 서너곡을 연달아 부른 것으로 기억된다. 여자 종업원들의 팁을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세어 주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렇게 기력이 좋던 분이 노령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결국은 타계하셨다. 세월 앞에는 인걸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鄭회장의 배려로 나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법률고문이 되어 현대와 인연을 맺었다.
명절 때는 서산 간척지에서 수확한 쌀을 보내주는 등 재벌 회장답지 않게 자상하게 친절을 베풀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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