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여남동 '제2의 노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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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전쟁 중 경북 포항의 한 해변에 모여 있던 피란민들이 미국 해군의 무차별 함포 사격으로 집단 학살된 사실이 '노근리 사건'에 이어 50년 만에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1999년 미 언론에 의해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이 알려진 뒤 피해자 유가족들이 최근 국회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기해 밝혀졌다.
영국 BBC 방송은 지난해 5월부터 포항 현지 취재에 나서 학살 정황을 확인, 다큐멘터리 '모두 죽여라'(Kill Them All)라는 프로그램을 1일(현지시간) 방영할 예정이다.
◇포격 현장='포항 함포사격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는 31일 "1950년 9월 1일 오후 2시쯤 포항시 여남동(현 환여동) 속칭 송골계곡 앞 바다에 미 군함 세척이 나타나 30~40분간 육지 쪽으로 집중 포격을 가해 1백명 이상이 숨지고 수백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절벽으로 된 바닷가 산 아래 백사장에서 1㎞쯤 떨어진 바다에 있던 군함들이 갑자기 피란민들이 모여 있던 백사장을 향해 포격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너비 10m·길이 1㎞ 정도의 백사장에는 포항 주민 등 1천여명이 피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책위 최일출(崔日出·69·환여동)회장은 "점심을 먹고 쉬고 있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려고 우왕좌왕하자 정찰기 한대가 머리 위를 저공비행한 뒤 곧바로 포격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崔씨는 포탄이 터지자 죽천리 쪽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으나 형(당시 32세)과 형수(당시 28세)가 그 자리서 숨졌다고 증언했다. 그는 "포격이 멈춘 뒤 백사장과 앞바다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시체더미에서 가족들의 시신을 찾았다"며 "적어도 1백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대책위 안인석(安仁錫·58·환여동)총무도 "어머니가 동생 젖을 먹이고 있는 사이 포탄이 날아왔다"며 "동생은 그 자리서 숨졌고 동생을 안고 있던 어머니는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평생 팔을 쓰지 못했다"고 전했다.
송골계곡은 높이 10m 정도의 절벽 아래 백사장으로 앞은 바다여서 포항시내에 진주한 북한군이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이 피란처로 삼은 곳이다.
◇포격 이유=유족들은 "미 해군이 양민임을 알고도 무차별 포격을 했다"며 "일주일째 별일없이 피란 생활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왜 정조준 포격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만 유족들은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모여있던 사람들이 술렁이자 인민군이 쳐들어온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포항 도심을 점령했고 국군은 밀리고 밀리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동해상에 배치된 미 해군은 함포사격을 포항 일대에 퍼부으며 포항 도심 탈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책위 활동 및 정부 입장=노근리 사건 공개 이후인 99년 11월 구성된 대책위는 지금까지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결과 사망자 38명, 부상자 20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 상당수가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고 대책위 활동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직까지 정확한 희생자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대책위는 국회 청원에 이어 정부에 진상규명을 공식 요청하는 한편 보상책 마련을 촉구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이 사건에 대한 자료가 없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며 "현재로선 현장조사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측도 "조사권한은 미 국무부에 있으며 조사 필요성이 있다면 노근리 사건처럼 한·미 합의에 따라 공동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송의호·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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