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돋보기] 대형 비리 사건을 왜 게이트라 부르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진승현.정현준.이용호.윤태식씨 이름 뒤에 '게이트'라는 말이 붙어다닙니다.

진승현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하는 식으로요. 미국에서도 얼마전 파산한 회사 '엔론'에 게이트라는 말을 합쳐 '엔론 게이트'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죠.

뒤가 구린 사건이 터지면 '00게이트'라고 표현하는데, 왜 게이트란 말을 붙이는지 알아볼까요.

게이트라는 용어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임기 도중에 물러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비롯됐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워터게이트 콤플렉스란 빌딩 군(群)이 있어요. 사무실과 호텔.식당 등 여러 건물이 모여있는 곳이죠.

1972년 38대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워터게이트 빌딩의 6층에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닉슨 후보측이 상대방 후보의 움직임을 알아내려고 이 사무실을 도청하려다 들키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답니다.

처음엔 단순한 절도사건인 것처럼 보였지만 워싱턴 포스트란 신문의 젊은 기자 두 명이 내막을 파헤치면서 사건이 커진 것이죠.

닉슨은 선거에서 이겨 73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감추려고 많은 거짓말과 조작을 한 것이 들통나 결국 74년 8월에 대통령직을 물러났지요.

닉슨은 이 사건을 '3류 절도사건'에 불과하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상대방 사무실을 불법으로 도청하기 위했던 것임을 워싱턴 포스트가 밝혀낸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의 승리를 위해 여러 기관장이 부산 초원복집에서 만나 얘기한 것을 국민당 정주영 후보측에서 도청했다고 해서 큰 논란을 빚은 적이 있는데, 이 사건에 워터게이트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밝혀진 뒤로 대형 비리 사건에 '게이트'란 말이 붙었답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으로 게이트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코리아게이트'이지요. 1976년 재미 실업가 박동선씨가 미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했다 해서 말썽이 된 사건입니다. 국내에서 발생한 각종 권력형 비리에도 게이트가 접미사처럼 따라붙었지요.

현 정부 들어 발생한 옷로비 사건은 '밍크게이트'로 불리기도 했지요. 진승현.정현준.이용호.윤태식게이트는 청와대ㆍ검찰ㆍ국가정보원 등 권력 심장부와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용호게이트를 수사하기 위해 '특별검사'가 등장했는데, 미국에서도 특별검사제가 처음 도입된 게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 때라는 점입니다.

미국은 지금 '엔론게이트'로 홍역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 '사업 구조조정의 교과서'로까지 불린 자산 1천억달러의 에너지 기업 엔론사가 막판에 살아남기 위해 정치권에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죠.

워터게이트 사건은 국가원수라고 할지라도 직권을 남용하거나 법을 어기면 물러나야 하며, 누구든 법 앞에선 평등하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겼지요.

요즘 문제가 되는 게이트들도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남길 수 있길 희망합니다. 물론 게이트란 말이 붙는 사건이 없는 세상이라면 더 좋겠죠.

허귀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