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정국, DJ 누구말 주로 듣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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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11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할 때 청와대의 '왕수석'으로 불렸던 박지원(朴智元)정책기획수석도 청와대를 떠났다.

그 이후 청와대에서 그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하던 역할을 몇 사람이 나눠서 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 들어온 이상주(李相周)실장은 비정치인이면서 탁월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청와대 비서실에 안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金대통령은 하루에 한번 꼴로 李실장을 불러 업무지시를 하고 있어 대통령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李실장을 찾는다.

그러나 과거 金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나 정치적 경험이 없어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중권(金重權).한광옥(韓光玉)전임 실장에 비해 역할이 줄어든 것이다.

金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비판이 민주당에서조차 제기되자 李실장 체제를 가동하면서 비서실장과 정책기획.정무.공보 등 일부 수석들의 '오전 관저(官邸)보고'관행을 없앴다.

그러다 보니 검찰총장의 거취를 비롯해 고위 공직자들의 '게이트' 연루의혹 등으로 떠들썩했던 최근엔 그 업무를 담당하는 김학재(金鶴在)민정수석의 대통령 집무실 발걸음이 잦아졌다.

그는 또 신승남(愼承男)전 검찰총장을 설득해 물러나게 하고 총장직을 고사하던 이명재(李明載)변호사와 이틀 이상 끈질기게 대화해 임명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그는 정부의 인사문제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金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뒤 유선호(柳宣浩)정무수석은 "할 일이 없어진 것 아니냐"는 농담을 종종 건네받는다.

정치권에 관한 상황파악은 늘 해야 하지만 거기에 어떤 작용도 해서는 안되는 정치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그를 찾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최근 청와대에서는 1급 비서관 두명의 활동이 눈에 띈다. 김한정(金漢正.39)제1부속실장과 박선숙(朴仙淑.42)공보기획비서관이 그들이다.

올해 들어서만 金대통령은 검찰총장의 경질과 임명, 부패척결 의지를 밝힌 연두기자회견, 국정홍보처장의 후임과 초대 부패방지위원장 물색 등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여러 현안을 처리해야 했다.

친인척의 '4대 게이트' 연루의혹, 개각의 시기와 폭 등 현재진행형인 문제들도 입체적인 정보와 종합적인 조언을 필요로 한다.

무수히 접수되는 보고서 더미에서 옥석(玉石)을 가리고, 완급과 경중을 분류하는 일은 1차적으로 김한정 제1부속실장의 업무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수석이나 관계부처 장관을 직접 부르거나 전화로 추가 설명토록 하는 등의 일도 그의 고유업무다.

단순한 심부름 역할 외에 金대통령이 물을 경우 현안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부속실장보다 영향력이 커졌다는 얘기다. 지금의 이상주 실장 체제는 비정치적이고 실무적인 참모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박선숙 비서관은 대통령 행사 때 金대통령에게 가까이 접근해 넥타이까지 바로잡아줄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金대통령은 야당 시절 부대변인으로 자신을 따르기 시작한 朴비서관을 아껴왔다. 공식업무는 청와대 인터넷 관리와 이희호(李姬鎬)여사의 인터뷰 처리 등이지만 대통령에게 시중 여론을 가감없이 전달해왔다. 정치적 판단력과 정보종합력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金실장은 경남, 朴비서관은 경기도 출신으로 金대통령을 야당 시절부터 보좌해 와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金대통령과 이들의 나이 차가 많아 모든 현안을 편안하게 상의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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