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논단] 드러난 '미국 정실자본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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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4년 전 아시아가 경제위기로 허덕일 때 수많은 논평가들이 아시아의 '정실(情實)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비판했다.

기업인들은 투자자에게 부채와 이윤 등 정확한 자산 현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정치적 연줄에서 풍기는 든든한 분위기면 충분했다. 위기가 닥쳐서야 국민의 감시가 시작됐지만 기업들은 순식간에 망했다.

엔론 사태의 정치적 후폭풍도 수수께끼다. 엔론을 파산에서 구해준 것도 아닌데 왜 부시 행정부는 엔론과의 접촉 사실을 숨겼는가.

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텍사스 주지사로 처음 출마하던 1994년에야 케네스 레이 엔론 회장을 알게 됐다고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했을까. 왜 언론은 중요한 의혹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들끓고 있는가.

엔론 사태로 미국식 정실자본주의의 전형이 폭로될까 부시 행정부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정실주의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거액의 선거자금을 제공한 미 최대의 바나나 생산업체인 치키타를 위해 클린턴 행정부는 유럽연합(EU)과 무역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부시가 수백만달러의 연봉을 주고 로비스트인 마크 라시코를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으로 영입한 것도 정실주의 때문이다.

문제는 엔론이 파산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점이다. 엔론의 레이 회장은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위원장에게 "자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좀 더 협조적이어야 한다"고 경고했었다. 정보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딕 체니 부통령은 지난해 봄 에너지 정책 입안과정에서 엔론사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위법행위다.

여전히 정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다른 에너지 기업들도 있다. 엔론 사태가 터지기 며칠 전 정부는 발전소의 오염 규제를 완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지난 주말엔 논란이 많던 네바다주 핵폐기물 저장계획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인터넷 경제신문 CBS 마켓워치는 핵폐기물 저장계획을 두고 "대형 에너지 그룹들의 정치헌금이 잭폿을 터뜨렸다"고 논평했다.

최근 몇달 동안 정치부 기자들은 테러 전쟁 보도에 바빴지만 경제부 기자들은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도해 왔다."몇몇 사업가들이 부시 행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입맛에 맞도록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경고한 사람도 푸념만 늘어놓는 정치 해설가들이 아니라 CBS 마켓워치의 주필이다.

미국의 경제잡지 레드 헤링은 최근 투자회사인 칼라일 그룹이 파산상태의 방위산업체들을 헐값에 인수해 신규 무기사업을 따낸 뒤 되팔아 엄청난 돈을 챙겼다고 폭로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이 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 10월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라덴 그룹도 칼라일의 투자자였다. 프랭크 칼루치 칼라일 회장과 대학 때부터 친분이 있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루세이더라는 자동화 야포시스템(AFAS)계획을 추진해 비난을 샀다.

어떤 의혹도 명백히 불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악취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것이 부시 행정부가 엔론 사태를 축소해 한 기업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폴 크루그먼<미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iht 1월 16일자 칼럼>

정리=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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