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이 시대의 정치이념 논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날로 깊어가는 경제침체와 살벌한 정치대결로 국민의 마음이 차갑게 얼어 붙고 있는 이때에 정치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사치라고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 자유주의를 비롯한 정치이념에 대한 관심이 단편적으로나마 되살아나는 징후가 보이는 것을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살아 숨쉬는 이상적 정치는 영혼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지키고 지향할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정치이념의 모색이 한국정치에서 복원되기를 우리는 목마르게 기다려왔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일단 성공했으면서도 성취감에 못지않게 허탈감에 싸여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때야말로 우리의 공동체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정치이념 차원에서의 진지한 국민적 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하겠다. 그것은 곧 진흙탕에 빠진 한국정치를 순화시키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정치발전에 약이 되게 하자

다만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를 포함한 정치이념에 대한 논의는 이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자세에 따라 정치발전을 위한 약이 될 수도 있고 정치퇴화를 몰고 올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성의 광장에서 차분히, 그러나 열정적으로 이뤄지는 이념논쟁은 민주사회 발전에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감정과 증오와 원한을 격렬한 표현으로 포장한 이데올로기적 충동은 결국 피 흘리는 혁명이나 파탄을 초래하는 독약이 된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무수히 보아왔다. 우리는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의 난투를 뒤늦게 이 땅에서 벌일 만큼 아둔한 시민들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시대.분단시대.권위주의시대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울분과 투쟁심이 체질화할 수밖에 없었던 슬픈 역사의 주인공들이었기에 남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 흥분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는 정치이념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한국적 상황과 전통의 특수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 논의되는 정치이념이든 간에 세계사, 특히 근대서양사상사의 흐름과 완전히 분리해 검토될 수는 없으며 우리는 그러한 지적 편협성을 극복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기에 자유주의를 비롯한 정치이념의 논의과정에서 불필요한 혼선이나 오판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서양사상사의 전개과정에서 명확하게 부각된 몇 가지 기본성격을 염두에 두는 것이 현명하다.

무엇보다 근대정치사상은 절대군주.교회.귀족이 지배한 전통체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 계몽사상을 토대로 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구체제로부터의 탈피는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는, 따라서 인간이성의 보편성에 입각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적 독선과 극단적 교조주의를 배격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정치이념의 전개과정에선 자기의 입장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광신적 배타성과 교조성이 이데올로기시대의 가장 무서운 병폐로 자주 나타났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과오를 뒤늦게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자유주의를 비롯한 근대정치이념은 그 내부에 피할 수 없는 모순과 딜레마를 처음부터 잉태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를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이념의 교조화나 급진화가 아니라 상황의 논리를 존중하는 타협과 조화의 지혜라는 것을 빨리 터득하는 것이다. 자유를 확대하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평등을 강요하다 보면 자유가 소멸된다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도 결국 이성에 의존한 민주적 대화와 타협으로 균형을 잡아 풀어갈 수밖에 없다.

*** 타협과 조화의 지혜 빨리 터득을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기본권이 보장됐다고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평등을 목표로 기본권을 제한하면 비인간화와 비능률을 동시에 조장한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단숨에 해결하려는 급진적 기도는 가공할 만한 희생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만다는 것은 소비에트나 나치스의 전체주의적 실험이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자유로운 민주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한국적 정치이념의 전개는 지성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새 정치문화의 정착을 위한 시민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