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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내 아들아, 전쟁을 말해 미안하구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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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전면전’이란 독한 평양발 협박이 휴전선 너머 남으로 쏟아지던 26일 오전. 나는 휴가 나온 큰아들을 힘든 마음으로 귀대시켰다. 상병도 반이 지나 ‘꺽상’이라며 제대를 꼽는 녀석. 자식의 편한 군 생활 바라는 여느 부모와 나도 다를 것 없는데 그게 어지간해야지. 녀석의 부대는 중부 전선 OO사단의 수색대대다. 비무장지대(DMZ) 안, 북한군 기관총의 사정거리 안에서 낮엔 수색하고 밤엔 매복하는 군인이니 뭘 더 말하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나보다 껑충 크고 스물 셋이나 된 애를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 “조심해라…일 나면, 정신 차리고. 잘해라….” “걱정 마세요.” 문 닫힌 승강기 안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0년래 최대 긴장이 깔린 최전방으로 복귀하는 아들.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어떤 형태든 전쟁을 반대하는 마음이 된다. 큰애가 제일 먼저 희생될지 모르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나는 전쟁의 참화를 여러 번 취재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의 무대인 소말리아 내전, 혈투가 벌어진 체첸내전을 봤고 가깝게는 이라크전쟁도 종군 기자로 갔다. 시체 썩는 냄새에 고개 돌리고, 포탄에 산산조각 난 폐허 더미를 보게 되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된다. ‘평화는 좋아요, 전쟁은 나빠요’라는 식의 유아적 논리가 아니라 죽고, 썩고, 산산조각 나는 것에 대한 본능적 혐오가 절로 그렇게 만든다.

천안함 용사 46명의 합동분향소였던 서울광장도 생각난다. 분향 첫날 나는 빗속에 긴 참배의 열에 섰다. 그런데 내 뒤에 나보다 댓 살 많아 보이는 남자가 경상도 사투리로 “이명박이 김정일 개ⅩⅩ를 놔두나. 해병대를 풀어 박살내야 한다.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고 시끄럽다. 그 소란함에 “전쟁 나면 당신이 싸우나. 내 자식과 젊은 애들이 먼저 죽는다. 당신이 죽을 거 아니면 조용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가 못했다.

그러므로 아들을 생각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떠올리면 ‘한반도의 전쟁’은 편들 수 없게 된다. 전쟁이 지난 50년의 성과를 재로 만들고 나와 내 자식들을 고생길로 몰아낼 것을 생각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관계없는 생존형 반전(反戰)이다.

그러나 내 자식과 나의 안전만이 반전의 논리일 수는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잘못됐든 어쨌든 생때같은 젊은이 46명을 죽인 북한을 그냥 놔둘 수는 없다는 게 문제다. 자식 같고 동생 같은 그들의 피를 뚝뚝 흘리는 북한에 아무 일 없던 듯 “잘해보자”고 할 수는 없다. ‘이명박 때문에 애들이 죽었다’고 손가락질하면서 피 뚝뚝 흘리는 북한을 ‘벌건 물감 만지다 온 사람 대하듯’ 할 수만은 없다. 조평통의 대남 정책이 싫다고 우리가 북한 군함에 어뢰를 쏜 일이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 보복의 전쟁사를 들먹일 것도 없다. 나는 ‘개과천선’이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평범한 TV 프로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문제견이나 문제아 대처법’은 ‘합당한 제재’가 답이고 상식이다. 다스리는 과정에서 뻗대면 원칙을 가지고 엄하게 대처하면 된다.

깡패 비위 맞추며 평생 살 수 없고, 이웃에 시끄럽다고, 귀엽다고, 버릇 없는 자식이나 애완견을 방치할 수도 없다. 대상이 국가라고 다를 것 없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으로 결론 난 이상 남은 일은 ‘합당한 제제’와 ‘그 과정에 대한 각오’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악바리 북한이 전쟁을 말한다면 우리도 대비하면 된다.

아들에게 그래서 미안하다. 녀석에겐 차마 말 못했지만 ‘전쟁이 나서 너는 DMZ에서, 아비는 서울에서 희생되더라도 각오하자. 내 아들아’라고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귀대 전 아들은 걱정하는 내게 자기는 안전할 것이라며 식탁에서 여러 설명을 했다. 믿을 수 없다는 걸 서로 뻔히 알면서 말하고 들었다.

그러나 당장 총칼 들고 전선으로 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속마음은 ‘죽음에 대한 각오’가 전쟁을 막는 힘이 되기를 더 바란다. 그런 준비도 없이 ‘전쟁은 무조건 안 된다’는 목소리만 높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유약해지고 또 얼마나 더 북에 시달릴지 상상하기도 싫다. 우리에겐 이미 충분히 상처가 있다. 그래서 28일 한ㆍ중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보여준 ‘중국의 반보(半步) 변화’는 아주 반갑다. 북한이 ‘한걸음 변화’로 이어받아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진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에는 북의 협박에 휘둘리지 않는 단호한 결의가 작용했고 또 더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안성규 외교안보 에디터 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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