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채봉 시인 1주기 추도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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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하늘나라에 가 있는 그가 휴가를 나온다면, 반나절 반시간 아니 아니 아니, 오분만 온다 해도 원이 없을텐데. 얼른 그와 눈맞춤을 하고 한 번이라도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봤으면….

7일 오후 서울 대학로 샘터파랑새 소극장에서 열린 동화작가 정채봉씨의 1주기 추모행사에 모인 사람들은 고인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 낭송될 때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엄마' 자리에 고인 이름을 넣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지난해 1월 9일 흰 눈이 수북이 쌓이던 날 타계한 작가는 검게 찌든 때로 덮인 온 세상을 살포시 감싸주던 그 눈처럼, 해맑디 맑은 동화와 시로 타고 타들어가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 메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곤 했었다.

때론 그가, 때론 그에게 마음을 빚진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오는 데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구순을 넘긴 수필가 피천득 선생, 고인과 의형제를 맺은 정호승 시인, 방송인 이계진, 조광호 신부, 원불교 박청수 교무 등 1백여명의 지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으며 가수이자 작곡가인 노영심씨가 연주를 했다.

1978년 월간 『샘터』에 입사해 23년간 이 잡지를 순수교양지로 일궈온 고인이 받들어 모셨던 분이 바로 수필가 피천득 선생. 피선생은 추모사에서 "다섯살배기 떠돌이 고아가 폭설 속에 암자에 갇혀 지내다 맑고 깨끗한 동심으로 부처가 됐다는 고인의 동화 '오세암'처럼 고인도 우리 마음 속에 하얀 동심의 화석으로 자리잡고 있다"며 그리워했다.

정호승 시인도 "험한 세상을 밝혀준 동심의 등대지기가 없으니 우리 앞 길이 얼마나 캄캄할까"라고 아쉬워했다.

이어진 차례는 고인의 생전 육성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믿음을 나도 믿는데, 내겐 아름다움 대신 동심이 믿음의 대상이다."

슬픔을 슬퍼하고 기쁨을 기뻐하고 사랑을 사랑할 줄 알던 아이들의 '완성된' 인격이 성인이 되면서 조각나 가식과 위선에 빠져드는 사정을 고인은 일찌감치 알았던 모양이다.이날 추모의 밤은 추억을 추억하며 깊어갔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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