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0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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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편 염문과 이소정은 배에 실려 청해진의 앞바다를 벗어났다.

뭍에 오른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마침내 산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 즉 두륜산(頭輪山)에 이르렀을 때에야 염문이 발길을 멈추고 숲 속의 계곡에 앉았다.

마침 만추의 계절이었다.

온 산은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고, 숲 사이로 그들이 도망쳐온 남해의 바다가 눈부시게 석양빛을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염문은 암석 위에 앉아서 한참동안 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하 이소정은 주인 염문이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고 있는가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염문은 물끄러미 물속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륜산은 가연봉을 비롯하여 도솔봉.혈망봉.향로봉 등 수많은 연봉들 사이로 깊은 골짜기가 흘러내리고 있는데, 그 계곡마다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져 내린 물이 평평한 바위틈에 소(沼)를 이루고 있었다. 염문은 그 늪속에 고인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소정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나으리, 소인이 죽을 죄를 졌나이다."

비록 해적출신이었으나 이소정은 신의를 갖고 있었으므로 주인 염문의 참화가 자신 때문임을 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미끼가 되어 섬에서 탈출하여 무주로 도망치지 아니하였더라면 주인은 이처럼 붙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으리, 소인을 죽여주옵소서."

그러나 염문은 이소정의 애원을 듣는지 마는지 암석 위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소정은 주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소정은 주인이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더럽혀진 얼굴을 씻기 위해서 물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앉아있음을 발견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이 평평한 바위틈새에 고여 작은 못을 이루고 있었고, 그곳에 고인 물은 고요하여 마치 맑은 거울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염문은 그 물을 거울 삼아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소정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비록 부하였으므로 팔꿈치에 묵형을 받았으나 주인 염문은 얼굴 한 중앙에 '盜賊'이란 두 글자의 묵형을 받았으므로 이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죄수의 신분을 숨길 수 없는 천벌을 받았음을. 자신은 긴 소매옷을 입는다면 얼마든지 팔꿈치의 묵형자국을 감출 수 있으나 주인은 하늘 아래에서는 그 어디에도 감출 수 없는 천형(天刑)을 받았음을.

평소에 잔인하고, 흉폭한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소정은 주인이 곧 자신에게 마땅한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생각하였다. 이제 곧 물에 비친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한 염문이 그 분노를 자신에게 퍼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물 속을 들여다보던 염문이 갑자기 몸을 세워 허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큰소리로 껄껄 웃기 시작하였다.

그의 웃음소리는 골짜기를 따라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한심하구나, 네 얼굴. 이제는 벗으려야 벗을 수 없는 대면(大面)하나를 얼굴에 쓰게 되었구나. 너는 이제 방상시의 탈이 아니라 귀신의 탈을 쓰게 되었구나."

"주인 나으리."

무릎을 꿇고 앉은 이소정이 몸을 떨며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이 소인의 잘못 때문이나이다.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네놈을 죽여 달라고."

크게 웃다 말고 염문은 피리를 세워들었다. 그 피리의 끝에는 검이 꽂혀있었으므로 그것은 자연 날카로운 패검(佩劍)이 되었다.

"오냐, 소원이라면 내가 너를 죽여주마. 허기야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하고 굳이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하늘 아래에서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여 무엇하겠느냐. 아니 그러하겠느냐."

염문은 단칼에 베어버릴듯이 피리의 검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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