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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콤플렉스, 20년 뒤엔 벗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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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세계 최강국 미국도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그중 하나가 금융 콤플렉스다. 증상은 대개 이렇다. ‘나보다 일은 많이 안 하면서 (금융인들은) 떼돈을 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내 세금(공적자금)을 뜯어간다’ ‘온갖 복잡한 논리와 상품으로 당국의 감시·감독을 피한다’ 등등. 아주 악질인 데다 재발도 잦다. 조이면 숨었다가 풀어주면 금세 다시 활개를 친다.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오바마 대통령은 금융 콤플렉스에 도전했다. 완치할 치료제를 만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때론 월가와 전쟁도 치렀다. 마침내 지난 주말 큰 성과를 올렸다. 미 상원에서 금융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 언론은 “80년 만의 대개혁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법안은 크게 은행의 파생상품을 규제하고 소비자를 더 철저히 보호하며 대마불사를 용납하지 않는 쪽에 맞춰졌다. 하원 안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선 같다. 늦어도 다음 달 중엔 상·하원 간 조율을 거쳐 단일 법안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오바마는 “월가의 무책임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며 “(법안 통과로) 이 같은 위기는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의 장담이 실현될지 여부는 관심 밖이다. 걱정은 당장 우리에게 튈 불똥이다. 미국은 ‘아메리칸 스탠더드=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굳게 믿는 나라다. 고심 끝에 만든 치료제를 혼자만 사용할 리 없다. 특히 파생상품 규제는 더 그렇다. 혼자 써서는 효과도 적다. 국익 차원에서도 손해다. 하루 10조 달러가 넘는 파생상품 거래의 절반 이상을 미국 금융회사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수수료 수입만 하루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투자은행들이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렸지만 그래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손발을 꽁꽁 묶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공화당과 월가가 거세게 금융개혁안에 반대한 이유다.

민주당과 오바마도 이런 ‘황금알’을 남에게 모두 넘겨줄 생각은 애초에 없다. 방법은 다른 나라 금융회사의 손발도 같이 묶는 것이다. 당장 11월 주요 20개국 회의(G20)가 주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세계 금융시장 안정’이란 명분도 좋아 거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순순히 받을 수도 없다. 우리의 파생상품 거래는 막 걸음마 단계다. 규제는커녕 앞뒤에서 밀고 당겨줘도 될까 말까다. 게다가 우리도 고질병이 있다. 외환 콤플렉스다. 세계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어김없이 원화 값이 급락하는 병이다. 재작년에도 그랬다. 잘못은 미국의 투자은행이 했는데 엉뚱하게 한국의 김씨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콤플렉스 치료제의 약발이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유효기간을 길어야 20년으로 본다. 20년 내에 다시 규제는 풀리고 머니게임이 재개된다는 것이다. 제프리 가튼 예일 경영대학원 교수는 “미국·유럽의 금융 역사는 자유방임과 규제 시대가 20년씩 이어졌다”며 “올해 만들어진 규제는 20년 정도 힘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우리에 가둬둔들 맹수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20년 뒤 규제가 풀리면 금융 맹수들의 공격은 더 난폭해질 것이다. 벌써 그날의 포효를 떠올리면 몸이 떨릴 정도다. 그때 한국 금융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건가. 다시 또 “나는 잘못이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소리만 되풀이할 텐가. “스미스 부인과 왕서방 마누라가 펑펑 쓴 돈 때문에 왜 내가 당해야 하느냐”며 하소연만 할 건가. 식상해 보이지만 해답은 금융 강국 코리아다. 전문가를 키우고 파생상품 거래·규모·투자를 확 늘려야 한다. 마침 미국이 제 손발을 스스로 묶을 때가 기회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