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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의미가 남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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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선생님의 영안실에 다녀와 책꽂이 저 위쪽에서 시집 처용과 처용 이후를 꺼내는데 책 속에서 뭔가 툭툭 떨어진다. 꽃이다. 말라서 빛깔이 다 거둬진, 그러나 줄기까지 형태만은 선명한 꽃이다. 시집 뒤편에 75년 4월 29일 포정동 본영당 서점이라는 메모가 있는 걸로 보아 그 시절 어느 날 끼워둔 꽃일 게다. 꽃이 있던 처용 39쪽은 누런 얼룩이 묻었다. 꽃에서 나온 수분이 종이를 우글쭈글하게 일그러뜨렸지만 그 페이지가 강렬한 호소력으로 내 눈길을 당긴다. <…꽃이 지면/여운은 그득히/뜰에 남는데/어디로 그들은 가 버렸을까>. 30년 전의 시를 들고 아연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을 어두운 창이 되비치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지금 보니 선생님의 시는 전혀 어렵지 않다. 난해하다고들 외면했지만 굳이 의미를 찾겠다는 의식 없이 읽으면 그냥 생소한 장면이 많은 풍경화일 뿐이다.

지난 가을 서울에 샤갈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때 선생님은 이미 의식불명이셨다. 샤갈전을 보면서 내내 내 청춘을 지배했던 선생님의 무의미 시를 생각했다. 선생님의 시는 샤갈그림과 똑같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다. 오갈피나무 아랫도리가 젖어있다면 젖어있는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보이는 장면의 연상으로 족하지 굳이 다른 의미로 얽어맬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 짧고 평이한 구절, <여운은 그득히 뜰에 남는데 그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는 선생님 돌아가신 날 30년 전의 마른 꽃과 함께 난데없이 내 눈에 튀어들어와 전혀 다른 감개를 준다.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의미가 수만 배로 확장돼 아둔한 내 머리를 친다. 시란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따로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나는 스무살에 선생님을 만났다. 아니 더 솔직히는 그 유명한 <꽃>을 달콤한 연애시로 착각해 입에 달고 다니던 내가 선생님 계신 대학을 구태여 지망했던 거다. 선생님께 시의 테크닉을 배우고 싶었다. 시는 기교와 수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당시 선생님은 시인은 한 시대에 하나면 족하다고 하셨다. 횃불을 자꾸 나눠 보일듯 말듯 줄여놓지 말고 한 사람만 커다란 횃불을 들어 어둠을 밝혀야 한다고 하셨다. 하긴 선생님은 태생부터 귀족이었다. 자장면 같은 건 드시지 않았고 체육대회 끝난 아이들의 시금털털한 땀냄새 곁에 앉아있는 것도 거부하셨다. 우리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않아 난 그저 김군이거나 자네였을 뿐이다. 그런 귀족주의가 밉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던 건 선생님의 새하얀 시 때문이었다. 뼈다귀만 남기고 쓸데없는 살덩이들은 다 뱉어버린 백골 같은 시들의 깨끗함 때문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너무 귀하고 높아 시를 쓰지 않았다. 시를, 내가 감히 도전해볼 수 없는 절대영역으로 두둥실 밀어올렸다. 마칠 종을 선생님만큼 자주 놓치던 대학선생님이 또 있을까. 마침종이 치고 10분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음 과목 선생님이 문앞에 와서 기다리는 걸 보고서야 아아 미안합니다 하면서 허둥지둥 교실을 나가셨다. 우리들은 그때서야 주술에서 풀려나 동시에 아아 하고 신음했다. 그런 몰두의 시간들이 우리 삶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걸 어제 영안실에 모인 이제 머리가 히끗거리는 동창들은 다함께 인정했다.

70년대 감색 양복이 남자 정장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 선생님은 갈색 홈스팡 재킷에 베이지색 코르덴 바지를 입으셨다. 머리엔 캐시미어로 짠 가벼운 베레모를 쓰시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으셨다. 멀리 시계탑 앞에 선생님이 나타나도 인문관 앞 벤치에 앉은 나는 선생님의 동작을 정확하게 캐치했다.

내게 가장 고귀하던 김춘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꽃은 져도 여운과 눈짓과 의미로 남는다고 가르치신 선생님, 우리는 죽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를 묻게 만드는 선생님. 만년에 수염을 기르신 우아한 모습의 영정 앞에 엎드려 나는 말했다. "선생님, 저 이제 시를 한번 써봐도 될까요?"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