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고재종 '동안거(冬安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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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고재종(1957~)'동안거(冬安居)'

그 정다운 '여인'은 '과거'속으로 사라졌고 '미루나무'는 '미래'를 향해 자란다. 오직 '현재'속으로는 '눈'만 쌓인다.눈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쌓이고 미루나무는 아래서 위로 길을 '세운다'.

나와 여인은 아래로도 위로도 못 가고 안방 문 드나들며 고구마 동치미만 꺼내 먹는다. 뜨겁게 익히고 시리게 쪼개 먹는 죄 없는 식욕이 정다웠던 우리들 일상의 겨울 참선,그것마저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구나.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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