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같은 책을 '하드커버-페이퍼백' 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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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국내 최대 학술서 시리즈 '대우학술총서'를 펴내는 아카넷 출판사에서 최근 색다른 출판형식을 선보였다.

지난해 총서의 4백88번째로 출간했던 『조광조』(정두희 지음)를 하드커버 대신에 페이퍼백으로 바꾸고, 가격도 1만8천원이었던 것을 1만원으로 대폭 내려 다시 펴낸 것이다. 내용은 오히려 하드커버보다 보강된 수정증보판이다.

같은 내용의 책을 하드커버와 소프트커버로 가격을 차별화해 동시에 내는 일은 출판 선진국에선 흔한 일이다.

하드커버는 책을 오래 소장해야 하는 도서관 등에서 주로 구입하고, 저렴한 가격의 소프트커버는 일반인이나 학생층이 주고객이다.

이는 필요에 따라 제품을 다양화해 독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양방향 전략이다. 이런 전략적 사고가 국내 출판계에선 아직 도입되고 있지 않은 터라 아카넷의 실험은 더 신선해 보인다.

아카넷의 김정호 대표는 "학생들이 저렴한 가격에 많이 사볼 수 있게 하기위해 소프트커버로 다시 냈다"면서 "앞으로도 책을 선별해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을 같이 펴낼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시차를 두고서 말이다.

아카넷이 이런 모험을 감행한 데는 기존 하드커버판이 대부분 도서관 등에서 이미 소화돼 유통과정에 혼란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김대표는 "하드커버 비용이 더 들뿐 페이퍼백을 같이 펴내는 데 제작상의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진국처럼 하드커버판과 페이퍼백판을 시차를 두지 않고 펴내기 위해선 도서관의 정책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대해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한 출판사 대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빌려 보는 도서관의 책과, 독자 한 명이 사보는 책의 가치를 동일하게 보고 같은 값에 판매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라고 반문한다.

도서관용은 처음부터 하드커버로 튼튼하게 만들어 값을 더 매기는 등 제작과정에서부터 차별화를 고려해 보자는 말이다.

가뜩이나 도서관의 도서구입 예산도 형편없이 부족한 실정에 더 비싸게 책을 사라는 말이 이상론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출판의 미래를 도서관 정책과 연계해 풀어가는 과정에 새겨들어 볼만 하지 않은가.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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