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돈 앞에 부서지는 인간의 모습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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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넘기는 남자
이청해 지음, 문이당, 297쪽, 9500원
소설가 이청해(56)씨의 소설집 『악보 넘기는 남자』는 시의적절하다.

1997년 외환위기보다 더한 불황이라는 암울한 경제 진단을 심심치 않게 접하는 요즘, 소설집에 실린 일곱편 중 상당수가 경제적 파탄 상태에 이른 인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경제적 어려움은 때로는 소설의 중심 주제로 부각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지 주인공의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정도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첫 소설 ‘오후의 빛’의 여주인공 신선영은 호감을 품고는 있었으나 연정으로까지 발전 시키지는 못한 10여년 전 동료교사 강희섭을 만나기 위해 지방도시로 내려간다. 자신의 장례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신선영은 이혼과 동시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방송작가가 돼 그럭저럭 살아왔으나 불치병에 걸렸다. 아이들이 있지 않느냐는 강희섭의 물음에 신선영은 돈이 없다보니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고백한다. 자식들이 중학교 초반까지는 엄마를 따르는 눈치더니 외모·실력·재능은 물론 존재 자체가 돈으로 증명되는 현실에 눈 뜬 후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성자는 대학 1학년 시절 매혹적인 여대생, 유리 구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기를 쓰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몽땅 치장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과도한 지출은 1년 뒤 치명적인 카드값으로 돌아왔고 등골 빠져가며 빚을 갚은 후에는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포자기 상태가 돼버렸다. 삼수 끝에 서울 명문대에 가까스로 입학할 수 있었던 성자는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 이것 저것 모두 실패한 상태다. 어느날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직업들을 공상해 본다. 그 목록에는 한의사·교사·공무원 같은 ‘우아한’ 것도 있지만 노점상·파출부·막노동·다단계 외판원에 심지어 배타는 일까지 포함돼 있다. 사람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는 파산의 비참함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사십대의 주인공 최는 외환위기를 만나 쪽박 찬 경우다. 서른둘에 다니던 침대회사를 그만두고 부속품 납품 회사를 차린 최는 한때 사업이 번창했으나 불가항력적인 철퇴(외환위기)를 맞는다. 버틸 여력이 없어진 채무자를 파산으로 몰고가는 자본주의의 채권 회수 시스템은 섬뜩할 정도로 냉혹하다. “(채권자들은) 목덜미를 물어뜯는데 이력이 나 있었고, 급소와 환부를 정확히 알았으며, 조직적으로 끊임없이 강도를 더해 가며 피 맛을 즐긴다.”개개인은 전문적인 조직 앞에 무력할 뿐이고 유일한 대응책은 소주의 힘으로 맞고함을 치며 대거리하는 것뿐이다. 최는 진정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중얼거린다.

살림살이의 파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 대한 믿음, 본질적인 인간성마저 위태롭게 한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의 소유 정도에 따라 개인들은 서열화된다.

‘두 사람’의 여자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위기 상황을 벗어나자 태도가 돌변한다. 가난뱅이 남자를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자의 남편은 예전에 국영기업체 사장이었다.

삼십대 후반, 사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만난 ‘오후의 빛’의 신선영과 강희섭은 전에 함께 근무했던 중학교를 찾아가는 길에 승용차가 러브호텔 앞을 지나치자 은밀한 제안과 거절을 주고받는다. 10여년 전에는 엄두도 못냈을 말들을 거리낌없이 주고받게 된 중년에 대한 묘사는 난숙하다고 할 정도다. 때문에 표제작 ‘악보 넘기는 여자’의 주인공 여대생을 통해 드러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어리숙함은 작가 이씨의 한계가 아니라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91년 늦깎이로 등단한 이씨는 젊은 시절 잡지사 기자 생활을 했고 90년에는 중편소설 ‘강’으로 KBS 방송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세태를 반영하는 시사적인 소재, 곳곳의 드라마적인 요소 등은 그런 이력 때문일 것이다.

신준봉 기자

***[바로잡습니다] 11월 27일자 북섹션 5면

11월 27일자 북섹션 5면에 소개된 이청해씨의 신작 소설집 제목을 '악보 넘기는 남자'로 바로잡습니다. 기사 앞에 붙는 서지사항에서는 맞게 소개했으나 본문에서 '악보 넘기는 여자'라고 잘못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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