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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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24. 수박 사건

나는 요즘도 수박을 먹을 때면 붉은 부분은 물론이고 하얀 속껍질까지 베어 먹는다. 언젠가 노인 내외만 사는 댁에 들렀다가 수박을 먹는데, 속껍질까지 먹는 것을 보고는 할아버지가 "스님이 아주 수박을 좋아하시는구만요. 여보, 여기 수박 더 가져오소"하며 수박을 잔뜩 가져와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다. 그렇게 수박을 먹을 때마다 성철 스님이 생각난다.

절집에선 별다른 군것질은 않지만 스님들이 둘러앉아 사과나 참외 같은 과일을 깎아 먹는 차담(茶談)시간은 따로 있다. 과일 깎는 책임은 꼴찌 행자한테 떨어지기 마련인데, 그때부터 나는 큰스님의 호통을 자주 들었다. 사과는 껍질을 종잇장처럼 얇게 깎아야하는데 나는 아무리 얇게 깎는다고 해도 늘 과육이 두툼하게 붙어 나왔다. 당연히 큰스님의 꾸중을 듣는다.

"저놈은 학실히 지 애비가 만석꾼인가 보제. 야 이놈아!"

차담이란 휴식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주 모여서는 안된다. 아무래도 젊은 스님들은 울력(공동작업)을 하고나면 모여 앉아 과일이나 떡을 먹으며 쉬고싶어 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그런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너거들같이 일은 눈꼽만큼 하고,먹는 거는 배가 터져라 먹는 놈들 처음 봤다. 그래 가지고 무슨 수행한다는 말 듣겠노. 일을 허리가 빠져라 하고,먹는 거는 눈꼽만치 먹는 일꾼들은 우째 하란 말이고. "

그래서 나는 어지간하면 아예 차담 시간에 참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원주(院主.암자의 주지)가 됐다. 안거(安居.외부출입을 않고 수행하는 것)기간을 전후해 일년에 네 번 3박4일씩 기도모임을 가졌다. 하안거(夏安居.여름철 안거)를 끝내는 기도 모임이 있던 날인데,신도회 회장을 맡고 있던 여신도가 찾아왔다.

"스님, 이렇게 덥고 하니 대중들이 기도하는데 신심 나게 수박공양을 한 번 합시다."

성철 스님이 기도중 간식을 말라고 했기에 나는 "참 같은 것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괜찮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신도회장이 "그 허락은 내가 큰스님께 받을 터이니 스님은 일꾼하고 가서 수박이나 사오이소"라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믿고 장에 내려가 큼지막한 수박 50여 개를 샀다. 지게로 지고 올라와 하루 저녁 산골짜기 시원한 물속에 띄워두었다. 다음날 오후 2시쯤 수박공양을 하는데, 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하다 먹은 수박 맛이 기가 막혔다. 잘 먹고 힘을 낸 신도들이 다시 기도 시간이 되어 각 방마다 들어가 우렁차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고 채 30분도 안된 시간. 성철 스님이 마당에서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너거 전부 당장 이리 모여봐라."

모두들 영문도 모르고 마당에 모였다. 여신도들은 성철 스님이 그렇게 노여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으니 다들 수군거리며 허둥댔다. 성철 스님이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신도들이 수박을 나누어 먹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쓰레기통에 버려진 수박껍질에 벌겋게 과육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돈은 너거 돈으로 수박을 사왔는지 몰라도, 먹을라만 농사 지은 사람 정성을 생각하고 먹어야 되는 거 아이가. 너거가 그런 생각이 쪼금이라도 있으면 수박 껍질이 하얗게 나오도록 먹어야지,이래 반도 안 먹고 내버려뿌면 우짜란 말이고. "

한참 꾸짖던 큰스님이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소리쳤다.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든지, 안그랄라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수박 다시 꺼내 다 먹든지. 빨리 둘 중에 하나 골라서 하란 말이다."

신도회장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몸을 낮추고 큰스님께 나가 빌었다.

"큰스님, 제가 불민해서 그랬으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신도회장이 빌고 또 비는 사이, 다른 신도들은 쓰레기통에 버려놓은 수박을 다시 집어들고 먹었다. 수박을 사온 장본인인 내가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그 날 이후로 수박을 먹을 때는 하얀 속껍질까지 먹는 버릇이 생겼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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