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뮤지컬·영화 해외돌풍 내용 전달력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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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995년 영화 '태백산맥'이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나갔을 때다. 당시 기자는 독일문화원의 도움으로 연수를 하고 있던 터라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그 영화를 보러갔다.

제3세계 문화의 유럽 진출 창구로 유명한 '세계 문화의 집'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마음 조리고 영화를 보던 기자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속수무책으로 자리를 뜨는 관객들이 늘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화가 났다.

영화가 껄렁해서 그런가,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나중에 영어에 능한 독일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해할 만한 답을 주었다."내용을 따라가기에는 영어 자막이 너무 부실해서 장시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풀이였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관객들의 '무례'를 용서할 수 있었다.

지난 97년 뮤지컬 '명성황후'의 뉴욕 공연 때도 미흡한 영어 자막으로 손해를 많이 봤다. 언론이 지적한 몇몇 약점 중에 자막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실험극도 아니고,'명성황후'처럼 스타일 못지않게 드라마의 내용이 중요한 공연(혹은 영화)이 해외에 나갈 경우 제대로 된 자막은 성공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당시의 아픈 경험 때문에 에이콤은 내년 2월 영국 런던 공연 때는 아예 배우들이 영어로 연기하는 '영어 버전'을 선보일 계획이다.

현재 일본 순회 공연 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앞의 두가지와는 반대의 케이스다.

도쿄 공연에서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한 사항 중의 하나가 바로 "자막이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쉬우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자막 덕분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이런 성과의 숨은 공신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고려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 네모토 리에(根本理惠)라는 젊은 일본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미 영화 '쉬리''박하사탕''친구' 등의 일본어 자막 작업을 통해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문화상품의 수출'은 이 시대의 화두다. 이를 위한 갖은 노력이 번역(자막)이라는 기초적인 문제에 걸려 좌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벨문학상을 위해서만 좋은 번역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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