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임오군란 뒤 14년간 용산 근거로 ‘조선총독’ 노릇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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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31면

위안스카이(1859∼1916·사진)는 중국과 한국의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탐욕과 교활, 치밀한 인맥관리와 탁월한 외교적 수완이 교직된 괴걸(怪傑)이자 난세의 간웅이다. 허난(河南)성에서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삼촌에게 양자로 들어갔던 그는 글 읽기를 싫어하여 누차 과거에 낙방했다.

숙부의 주선으로 23세 때인 1882년부터 한성방위 책임자로 조선에 들어온다. 사사건건 내정 간섭을 했던 그는 인생의 황금기 중 14년을 조선에서 보냈고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무려 10명의 처첩 사이에 아들 17명을 포함해 32명의 자식을 얻었다. 청나라 황제의 전권대사로 임명돼 조선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무렵에는 왕족을 포함해 3명의 조선 여인을 첩으로 삼기도 했다.

1886년 당시 서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은 의료선교사 출신의 미국 공사 알렌이었다.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알렌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다. 알렌을 비롯한 일본과 서양의 외교관들은 걸어서 입궐하는데 유독 위안스카이만은 가마를 타고 입궐했다. 알렌은 이를 문제 삼았고 고종에게 모든 외교관이 가마를 타고 입궐할 수 있게 조치해 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물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위안스카이만 여전히 가마를 타고 입궐할 수 있었다.

그는 상국(上國)에서 조공국 조선에 왔으므로 특권을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각국 공사나 총영사들보다 한 등급 높다고 여겨서 그들과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오만한 태도를 모두가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종과 민비는 그 때문에 몹시 불안했다. 서울 주재 외교관들은 그를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황제의 권한 대행, 조선총독 노릇을 했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용산·인천·부산·원산에 경찰을 배치하여 청상(淸商)들을 지원했다. 청상은 순풍에 돛 단 듯 상권을 확대할 나갈 수 있었다. 남대문과 종로 일대까지 중국인 거리가 생겨나고 종로시전을 비롯한 한성의 조선 상가들은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동학의 잔당들이 위안을 암살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변장을 하고 야반도주한다. 미국공사 알렌 역시 을사늑약 직후 미련 없이 조선을 떠난다. 라이벌 같았던 둘의 공통점이다.

위안스카이는 인맥관리의 귀재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톈진에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고 훗날 북양군벌이라 불리는 심복들을 키웠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 심복 루안쫑수(阮忠樞)는 여자를 하사해서 얻었다. 루안이 좋아하던 기녀를 빼내 깜짝 선물로 줘 환심을 산 것이다. 1911년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군권을 다시 장악했다. 그는 청 왕조를 배신한 채 쑨원(孫文)과 막후 협상을 통해 마지막 황제 푸이를 퇴위시키고 자신은 대총통에 올랐다. 1916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마침내 대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국내외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친 그는 3개월여 만에 군주제를 철회하고 두 달 만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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