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DJ의 '박지원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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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왜 박지원(朴智元)이었나"-. 그가 청와대(정책기획수석)에서 떠난 뒤 생긴 권력 내부의 빈자리는 크다. 그의 낙마가 DJ 용인술(用人術)의 좌절인 탓에 공백은 커보인다.

朴전수석을 왜 중용했을까의 물음은 심리적 압박과 긴장감으로 꽉찬 DJ의 국정운영 스타일 속에 해답이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감,'위대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역사의 경쟁의식은 긴장도를 높인다. 정책 사안에 DJ식 철학.이념적 의미부여를 하다보면 접근하기 힘든 외경(畏敬)의 존재가 된다.

*** '노인 정치' 익숙한 말 벗

金대통령은 긴장의 벽을 상대방의 부드러움으로 풀려고 했다. 편안한 보좌를 원했고 아이디어나 대안을 바랐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정치문화에서 직설화법이나 직언(直言)은 긴박감을 낳는다.+,-의 같은 전극끼리 만나면 파열음이 나듯 긴장도를 높이는 딱딱한 만남을 꺼리게 된다.

DJ식 사람쓰기의 생리를 체득한 측근이 朴전수석이다.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을 곁들여 DJ가 듣고 싶은 사안을 순발력있게 공급했고 판단을 도왔다. DJ가 '편하게 쓸 수 있는 충성스런 참모'로 자기관리를 했고, 그런 열정은 DJ의 인정을 받았다.

권력세계에서 그런 평판을 얻으면 고급 정보, 사람에 관한 미묘한 첩보가 모인다. 장관.의원.재계인사로부터 '대통령님께 대신 건의해달라'는 부탁,'민심을 잡을 수 있다'는 정책아이디어,'누가 술좌석에서 반(反)DJ 발언을 했다'는 고자질까지 쏟아진다.

그런 것들이 상승효과를 일으켜 국정보좌의 힘은 강해지고, DJ의 비밀스런 의중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된다.'주군(主君)-가신(家臣)'관계에 익숙한 권노갑(權魯甲)전 최고위원 등 동교동계 구파도 흉내내기 어려운 노하우다.

업무강도가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말 벗'이 필요하다. 노여움과 집착이 유별난 '노인정치'에서 정치적 재담은 소화제와 같다. 朴전수석은 그 효용성을 알고 있었고, 그런 측면에서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장관이 돋보인다. 金전장관의 소설가적 감수성은 골치아픈 국정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 대안을 내놓는 특기로 작용했다. 金전장관이 '엄격한 선생님한테 귀여움 받는 학생'이 된 이유다.

朴전수석이 국정 보좌의 중심에 섰던 배경은 DJ의 신임만이 아니었다. 동교동계 구파의 지원이 있었다. 동교동계는 자신들과 DJ를 연결하는 창구로 朴전수석을 이용하고, 朴전수석은 동교동계를 방어망으로 활용하는 공생관계로 비춰졌다. 그런 모습은 '목포출신 5인방'이니 '거기서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의심가득한 논란을 낳았다.

동교동계의 보증은 정권 초기 민주당 이강래(李康來.전 정무수석)의원의 퇴장 때 위력을 발휘했다. DJP 제휴의 대선전략을 짜냈던 책사(策士)시절의 李의원에 대한 DJ의 믿음은 한때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李의원은 동교동계가 비토하는 바람에 밀려난 것으로 당내에서 기억한다.

편애는 질시와 반목을 키운다. 신임받는 대상이 한정되면 정권 기반이 허약해지고, 국정 운영의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한다. 신임을 받는 사람이 과욕을 부리려 하면 비난은 커진다.

DJ의 눈높이에 맞추는 보좌를 게을리해 권력의 변방으로 물러난 사람들도 기회다 싶어 비난에 가세한다. 지난 9월 청와대 이상주(李相周)비서실장-유선호(柳宣浩)정무수석의 예상밖 인사 때 朴전수석이 '왕수석'으로 대통령의 대리인이 되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 청와대 특보단 만들어야

민주당 총재직 사퇴가 화려한 조명을 받지못한 불행은 용인술의 허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국정운영의 새로운 추진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 출발은 대야.대여.대정부 관계를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설정하느냐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들의 역량은 떨어진다.그렇다면 비서실을 개편하거나, 특보단을 만들어야 한다. 총재직 사퇴의 비장한 정치실험을 정치사적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경륜을 가진 인물을 청와대에 포진시켜야 한다. 국정보좌의 새로운 패턴은 '박지원 이후' DJ가 풀어야 할 첫 과제다.

박보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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