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호 기자의 철학 에세이] 보수의 상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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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올봄 남가주 대학(USC)의 인문학 강의실. 침침한 형광등으로 다소 으스스한 통로를 통해 들어간 그곳에선 문화연구를 주제로 하는 세미나가 열려 대중문화 이론가.페미니스트 등 소위 '문화좌파'들이 모여들었다.

문화좌파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청산을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구(舊) 좌파'와 달리 '문화적 자율.연대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냉전시대에 지역을 '대상'으로만 삼은 지역연구와 달리 탈냉전 이후 부상한 문화연구가 지역을 '주체'로 삼는다는 것도 '문화'와 '좌파'가 결합될 수 있었던 지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한 교수 얘기다."나는 보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그들은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변화를 고민하지 않는 보수에겐 문화적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으며 그들은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보의 상상력이 문화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경우는 적지 않다.이율배반적이지만 60년대 후반 프랑스 학생운동의 실패는 곧 '성공'한 문화혁명으로 평가받았다.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의 상상력』(이후刊)에서 이 명제를 사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학생운동은 그 실험이 좌절된 후 환경.여성운동과 같은 신좌파로 전환했고, 그것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 내면화한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비슷하다.

소위 혁명적 좌파가 1990년대 어떤 이유에서든 좌절을 겪으면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문화좌파로 전환했다. 환경.여성.시민운동이 그러하고 문화적 코드를 통한 사회적 저항을 표현하는 문화운동과 문화연구가 그러하다.이들이 '내 마음 속의 권위주의'를 없애는 데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성과도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회에 대한 낭만적 이해와 아마추어리즘적 접근으로 이들이 가진 예전의 도덕적 우위가 위협받기 시작한지 오래다.특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한 현정권과 차별화에 실패함으로써 그들은 정파성 이상의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제 공은 보수에게 넘어갔다.당분간 진보는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준비해야 하는 반면 보수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개혁과 변화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강정인(서강대.정치사상)교수는 『사상』가을호에서 한국 보수주의의 특징으로 전통과의 단절과 철학의 부재를 들었다. 전통을 통해 보수가 끊임없이 자기 갱신할 수 있는 철학적.지적 상상력의 빈곤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향후 우리 사회에서 보수도 개혁을 피해갈 수 없다.보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다. 문제는 이런 개혁을 수행할 만한 열린 태도와 사회학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프랑스 혁명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보수주의를 정식화한 보수주의 이론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도 보수를 "사회의 근간이 파괴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고 규정했다. 보수에게 상상력을 기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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