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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원 백진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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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세 시간 전에 처음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도 결혼 후엔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어릴 적 회사에 다녀야 할 아버지가 집에 있는 적이 많았다. 내가 물어보면 회사를 그만두셨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올해 일본 총선에서 참의원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백진훈(46)씨. 일본 이름은 하쿠신쿤이다. 그의 명함엔 '어머니의 나라 일본, 아버지의 나라 한국, 참의원 하쿠신쿤'이라 적혀 있다. 지난해에 국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꿨다. 백 의원은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도쿄(東京)에서 태어났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극심한 빈곤 속에 성장했다. 한국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인 아버지와 결혼한 딸을 보지 않았다. 대학 나온 아버지는 거듭되는 실직에 절망했다. 동생은 20대에 자살했다. 백 의원 자신도 '조선인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대기업 취직에 실패했다.

지난주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회장 장만기) 초청으로 서울 롯데호텔에서 강연한 백 의원은 한국과 일본 간 감정의 악순환 구조를 설명했다. 일본 정치인이 망언을 하면 한국의 언론이 화를 내고, 그중에서 가장 과격한 것만 골라 일본 언론이 보도해 다시 일본 우익들의 화를 돋운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인에 대해 '늘 역사 문제를 생각하면서 일본에 화를 내는 국민'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의 언론이라고 했다.

백 의원은 언론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다. 차이를 부인하고 차별을 증폭하는 의사소통법을 안타까워했다. 그가 제안하는 한.일 간 의사소통법은 차이의 유쾌함으로 상대방의 흥미를 끌고, 그걸 바탕으로 편견과 차별을 단계적으로 해소하자는 방법론이다. 그는 한국 문제 전문가로 일본 TV에 출연했을 때 의도적으로 한국인의 독특한 생활, 군대, 결혼, 학생들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독도나 동해 얘기는 뒤에 덧붙였다. 일본 민주당이 그를 공천한 것은 TV 속 그의 말하기가 유권자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백 의원은 "일본인들은 역사 문제를 먼저 말하면 전부 도망간다"고 했다.

백 의원이 차별을 이긴 지혜는 비장한 민족의식을 명랑한 의사소통으로 잘 감싼 데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