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운드 농산물 개방 거센 압력] 쌀 수출국들 강공에 연합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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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카타르)=홍병기 기자]'사막 위에서의 불안한 만남'으로 불리는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는 10일 농업과 반덤핑 등 6개 분야로 나뉘어 구체적인 협상에 들어가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각국 대표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편을 가른 가운데 팽팽한 논쟁을 벌였다.무역자유화의 기치 아래 시작한 뉴라운드 협상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서 각국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 들었다.

농업 분야와 반덤핑 협정 개정을 최대 목표로 삼은 한국도 바삐 움직였다.수석대표의 기조연설 등에서 농산물 수출 국가의 강경한 입장 발표가 잇따르자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와 쌀 시장 개방 협상을 앞둔 한국 대표단은 우루과이라운드 못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서 심야 비상대책 회의를 하는 등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 농업 분야가 최대 쟁점=농산물 수출 국가의 모임인 케언즈 그룹과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NTC)을 주장하는 한국 등 수입국 중심 NTC그룹간 대결로 압축됐다. 공산품 수준과 동등한 농산물의 대폭적인 시장 개방을 주장하는 호주.뉴질랜드.브라질 등 케언즈 그룹은 9일 장관 회의를 열어 "대폭적인 시장 접근과 관세 인하가 이뤄지지 않으면 뉴라운드는 의미가 없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맞서 한국과 유럽연합(EU).일본 등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에 관심 있는 40개국이 이튿날 따로 모여 "획일적인 시장 개방은 국가별로 다양한 상황을 반영할 수 없다"며 나라별로 특수한 생산 여건.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이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자 현지 언론들은 그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는 '불만족의 균형(Balance of unhappiness)'이 계속되고 있다고 표현했다.

미국도 한국과의 양자협의에서 "현재 상황에서 선언문 초안의 특정 문구를 수정할 경우 연쇄적인 수정이 불가피해 선언문 협의에 실패할 수 있다"며 현재대로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혀 한국측을 압박하고 있다.

케언즈 그룹은 아직까지 한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농업보호 조치의 철폐와 예외 불인정을 강조하며 농산물 수입국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같은 농산물 수출국의 공세로 각료 선언문 초안은 농업시장 개방.관세 인하 원칙 등에 있어 '실질적(substantial)'이라는 표현을 채택했다.1999년 미국 시애틀 회의 때의 '광범위한 단계적인 상당 수준(Broaded substantial progressively)이란 표현보다 수출국의 입장을 더 반영함으로써 한국의 입지가 좁아졌다.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도 앞으로 협상에서 반드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한다(will be considered)'라는 약해진 표현으로 결정돼 자칫 협상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도 있다.

농업분야 협상 대표인 김동근(金東根)농림부 차관은 "한국이 앞장서 농산물시장 추가 개방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국들로부터 집중 공세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며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을 인정받은 것을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삼고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번 회의는 향후 협상 원칙과 목표만을 정하는 것인 만큼 3~4년 이상 걸릴 후속 분야별 협상이 끝나야 국내에 실제적인 시장 개방 조치에 따른 영향이 미친다"고 설명했다.

◇ 반덤핑 개정.환경 의제도 논란=반덤핑 조치의 남발을 막기 위해 WTO 협정을 개정하자는 주장에 대해 미국이 홀로 반대하며 한국.유럽연합(EU) 등 나머지 회원국을 상대로 버거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미국 의회의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는 미국 대표단은 반덤핑 협정 개정이 슈퍼 301조 등 미국 산업 보호 장치를 겨냥한 것이라며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역.환경 분야에선 환경정책이 미흡한 나라에 대해 무역 규제를 하자고 EU가 강력히 주장하자 인도.브라질 등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 기준의 강요'는 있을 수 없다며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지적재산권 보호와 의약품 접근(공중보건)문제를 놓고도 선진국과 개도국간에 논란이 가열돼 '신(新)남북문제'로 번지는 모습마저 보였다.개도국들은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에이즈와 결핵 등 전염병 치료제를 값싸게 생산.보급하기 위해 지적재산권 보호에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용어설명>

◇ 뉴라운드=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한 국가들이 모두 모여 관세.무역에 대한 국제규범을 만드는 협상이 '라운드'다. 뉴라운드란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GATT 가맹국이 새로 시작하려는 협상이다. 논의 대상은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제대로 합의하지 못한 농산물과 서비스 분야 외에 공산품의 추가 관세 인하.반덤핑협정 개정 등이다.

◇ NTC=농업의 비교역적 기능(Non-trade concerns)의 약자다. 농산물은 TV.자동차 등 공산품처럼 국가간에 사고파는 상품 중 하나지만 동시에 식량 안보와 환경보전.농촌개발이라는 특수한 기능이 있다는 뜻이다. 농산물을 수입해야 하는 국가들로선 농산물을 공산품과 같이 다뤄선 안되며 이런 기능을 고려해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시장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케언즈 그룹=농산물 수출국 중 수출 기업에 정부가 보조금을 주지 않는 국가들의 모임을 말한다. 1986년 호주의 케언즈에서 결성됐다. 값싼 농산물을 대량 수출하는 국가들이기 때문에 농산물 무역자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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