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정 조기집행' 말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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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불경기에 대처하기 위해 재정을 더 빨리, 더 많이 쓰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돈 나간 것을 보면 그게 아니다.

기획예산처가 최근 파악한 바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실제 집행된 재정(예산+기금+공기업 사업비)은 96조원으로 올 한해 쓰기로 한 1백25조원의 77%에 그쳤다.

경기 진작을 위한 예산 조기 집행.재정 지출 확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올해는 이제 두달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도 집행되지 않은 재정이 전체의 4분의1에 가까운 29조원이기 때문이다. 여기다 지난 5일 국회를 통과한 추경 예산 1조6천억원도 올해 써야 할 돈이다. 있는 대로 쓰려고만 해도 두달 동안 30조6천억원이나 써야 할 판이다.

급기야 기획예산처도 '돈 다 쓰기'에 비상이 걸렸다. 이용걸 재정정책과장은 "남은 두달 동안 예산을 최대한 쓰도록 독려할 것"이라며 "그래도 4조~5조원 정도는 못쓰고 내년으로 넘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돈을 다 쓰기도 어렵지만 무조건 다 쓰라고 밀어붙이다가는 자칫 마구잡이 졸속 사업이 벌어질 우려도 있어 기획예산처는 이래저래 걱정하고 있다. 재정경제부가 그동안 각 부처에 자금을 배정하고 이른바 '배정률'만 파악해왔다. 돈이 언제 얼마나 시중에 풀렸는지를 보는 '최종 집행 진도율'을 점검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어서 예년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재정 집행이 이처럼 더딘 것에 대해 기획예산처는 ▶정부 각 부처의 예산 집행 과정이 본디 더딘데다 ▶지난해 말 여야 대치로 올해의 예산안이 법정 기한(12월 2일)을 훨씬 넘긴 연말에야 통과된 것도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중앙정부에서 예산 조기 집행이란 말만 무성했지 최종 집행기관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정치권도 발목을 잡았다는 얘기다.

여기다 토지 보상 등의 민원으로 사업이 중단되는 경우도 잦고, 불경기 탓에 재정 융자를 받아 사업을 하려는 신청자가 줄었다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기획예산처는 내년에는 돈이 1월부터 풀릴 수 있도록 각 부처와 공기업에 이달 중순까지 미리 내년 사업추진 계획을 세우라고 통보했다.

정부는 또 각종 융자 예산의 지원 대상과 조건을 미리 정해 내년 초 공고하고 대출해 줄 방침이다.

고현곤.송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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