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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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왕도 경주를 다녀온 장보고는 영일만에서 배를 타고 고향 완도에 금의환향하였다.

장보고로서는 거의 20년만에 찾아온 고향이었다. 20대 초반에 중국으로 건너갔던 장보고는 그러나 40세의 나이로 이제는 흥덕대왕으로부터 '청해진대사'라는 직함을 제수받고 돌아온 것이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였으나 20년이 지났으니 강산이 두번이나 변할 듯도 싶었지만 여전히 옛 산은 옛 산 그대로였고, 바다는 바다 그대로였다.

장보고는 우선 부하들인 낙금(駱金), 장변(張弁),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을 거느리고 완도의 주산에 올랐다. 이들 부하는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무령의 군중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거느리고 있었던 효장(驍將)들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던 그들은 장보고의 말 한마디에 당장이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들이었다.

완도는 우리나라에서 여섯째로 큰 섬이었고, 완도의 주산은 6백44m에 이르는 제법 큰 산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곧 도치봉이라고 불리웠을 뿐 아직 제대로 된 산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장보고는 부하들과 더불어 도치봉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굽이굽이 뻗어내린 산 아래로 펼쳐진 바다와 점점이 떠있는 섬들의 모습이 아득히 보이고 있었다.한눈에 완도 앞바다의 전경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보고가 선 자리는 상여바위라고 불리는 암벽, 바로 밑이었다.

암벽 사이로 맑은 석간수까지 흘러내리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산 아래로 바다가 펼쳐 보이고 산 뒤로는 깎아지른 암벽들이 자연적인 병풍노릇을 하고 있어 아늑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자신이 선 자리에 절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흥덕대왕으로부터 청해진대사로 제수받고 고향 완도에 돌아와 장보고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주산 도치봉에 올라 절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장보고는 그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

이는 장보고의 독특한 불교사상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중국의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이란 절을 짓고 있었다.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은 그의 일기에서 이 법화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기 839년 6월 7일.

정오쯤 북서풍이 불기에 돛을 올리고 나아갔다.오후 2,3시 무렵 적산의 동쪽 해변에 배를 대니 북서풍이 몹시 분다. 적산은 순전히 바위로 되어 있으며, 매우 높다. 산속에 절이 있는 그 이름은 적산법화원이다.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절이다. 그는 이곳에 토지를 갖고 있어서 양식을 충당할 수 있다.그 토지에서는 1년에 5백섬의 쌀을 소출하고 있다….'

엔닌의 일기처럼 이미 장보고는 당나라에 1년에 5백섬의 쌀을 소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법화원을 건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법화원은 장보고 휘하의 장영과 최훈 등 세명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었고 상주승은 24명, 비구니 2명, 노파3명 등 29명이 살고 있었던 대가람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맺은 강회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시주인들이 참예하고, 마지막 이틀간은 수백명의 신라인들이 신라풍속과 신라말에 의해서 거행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장보고 자신이 독실한 불교신자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신라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조직하고 묶기 위해서는 불교의 힘을 빌리는 독특한 통치술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장보고가 완도에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도치봉 상여바위 밑에 '관음사'란 절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으며, 아울러 산 이름을 상황산(象皇山)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었다. 장보고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산은 아직도 현지에서 상황산으로 불리고 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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