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러닝 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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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지의 한적한 아침 바닷가를 다정하게 산책하고 있었다. 바람은 상쾌했고, 파도는 약간 높았다. 아무 말 없이 걷던 신랑이 갑자기 바다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아 노래하라, 파도여 춤추어라!"-잠시 후 신부가 행복에 젖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어머, 신기해라. 정말로 바람이 노래하고 파도가 춤을 추네요."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만드는 신혼유머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무리 애틋한 사랑의 감정도 결국은 뇌의 화학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좀 썰렁하지만 사실이 그렇단다.

지난해 미국 코넬대 연구팀은 인체의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이 '사랑의 네 단계'에 각각 작용한다고 발표했다. 처음 호감을 느낄 때는 대뇌에서 도파민이 생성돼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제어하기 힘든 열정이 분출될 때는 페닐에틸아민, 성적 관계가 이뤄지는 단계에선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마지막 4단계에서 엔도르핀이 안정을 되찾게 해준다는 것이다. 위의 신부에겐 이 중 적어도 세 종류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수컷 고릴라들의 털은 보통 검은색이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등에 은빛 털이 돋아난다.이들을 '실버 백'이라 부른다. 자신감이나 승리감, 우울증과 관계있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고릴라의 털 색깔 변화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국회의원 후보자가 선거운동 때 보여주는 활동력과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다. 나이가 훨씬 젊은 운동원들이 후보를 그냥 따라다니기조차 힘겨워할 정도다. 많은 당선자들은 "매일 새벽 5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강행군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피로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마찬가지로 당.정 요직에 임명된 정치인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설대로 몰라볼 정도로 의욕적으로 변신한다. 그들의 등에 은빛 털까지 나지야 않겠지만, 무언가 작용하는 물질이 있을 법하다.

마라톤에 몰두하면 '러닝 하이(Running High)'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30분 가량 달리면 찾아오는 즐겁고 상쾌한 기분으로, 베타 엔도르핀이라는 물질 덕분이라 한다.

이 핑계 저 구실로 운동을 망설이던 독자가 있다면 가을이 가기 전에 달리기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마침 모레 서울 잠실에선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서울국제하프마라톤대회도 열린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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