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대통령을 빨갱이로 모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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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열흘 정국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국민적 의혹으로 부각될 야당의 폭로가 줄을 이었다. 워낙 동시다발로 얽혀 뭐가 뭔지 모를 복잡한 사연들 같지만 크게 정리하면 두가지다.

하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혹제기이고 또하나는 이용호게이트 속편과 분당 땅 의혹사건이다. 또 의혹사건 배후에 대통령 아들인 김홍일(金弘一)의원이 조폭과 관련 있는 듯 제주도 휴가회동이 뒤이어 터졌다.

요약하면 아버지 대통령은 좌파.용공세력이라는 것이었고 아들 국회의원은 조폭과 무슨 흑막이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것인가. 만약 이게 어느 정도라도 사실에 가깝다면 이 땅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다.

金의원 의혹 부분은 본인 스스로 소명했다지만 그의 주변인물들이 대통령 아들의 위세를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했을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이 부분 검찰이 확실히 밝히든지 그도 안되면 다음 정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나라 장래를 위해 대통령 의혹부분만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일이다.

***편가르기의 전형적 수법

나는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적 지지자다. 남북화해.교류.협력의 기조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해선 안될 대북정책이라고 믿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남북 공동성명서의 낮은 단계 연방제 합의,대북협상의 전략부재, 공론화를 거치지 않는 정책결정, 개성공단개발 곧 '중동특수'운운의 정치적 선전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비판도 해왔다.

그렇지만 통일논의란 게 논의 자체에 빠져드는 말장난일 수 있고 대북교섭의 상당부분이 비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 정치적 과장표현은 그의 오랜 정치적 관행이라는 점에서 비판하면서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대통령을 친북.용공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말이 친북.용공세력이지 사실은 빨갱이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다. 빨갱이란 말은 좌우대립의 낡은 편가르기의 전형적 수법이다. 적어도 남북화해의 시대라면 좌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열린 보수여야 하는데도 툭하면 말꼬리를 잡아 빨갱이 색출작업을 벌인다.

'세번의 통일시도'를 언급했던 문제의 대통령 기념사 시비도 마찬가지다. 신동아 11월호 '친북정권이냐 반북정권이냐'에서 정치외교학 전공의 32인 교수는 DJ 색깔론을 이렇게 잘 정리하고 있다.

①평화통일을 강조했지만 신라.고려통일과 6.25를 병렬로 놓은 것은 오해를 부를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②야당의 친북 좌파정권 발언은 지나쳤다. 적과도 협상.대화를 하는데 대화하고 협상했다 해서 적의 정통성을 인정한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구대열 교수 지적처럼 대통령이 아는 게 너무 많아서 생겨난 식자우환의 발언 같다. 6.25를 학술적 관점에서 몰가치적으로 발언하면 양해될 수 있지만 국가지도자 발언으로선 부적절했다는 비판으로 끝낼 일이었다. 이를 두고 언제까지 빨갱이 타령을 할 것인가.

보름 전 부시 미국 대통령이 '국가건설'이라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미국 최대의 유력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부시의 연설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부시에게 냉소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뉴욕타임스는 "미국을 덮었던 슬픔과 연민, 그리고 결단력을 반영하며 어려운 시기 국민이 따를 만한 지도자"로 '사령관 부시'를 높이 재평가했다.

***아름다운 결실 생각해야

지금 우리는 어떤가. 세계경제의 동반추락과 함께 그 좋다던 반도체 사업은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철강 수출마저 막힐 조짐이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갈 길도 어두운데 앞 길을 열고 불을 밝히는 지도자가 없다.

YS정부의 마지막 1년을 되돌아 보라. 한보철강과 김현철 사건으로 국민 모두가 의혹의 미궁에 빠져 있는 동안 외환위기와 IMF사태가 스물스물 안개처럼, 게릴라처럼 우리를 뒤덮지 않았던가. 지금 또 그 안개가 언제 덮쳐올지 두렵다.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전면에 한편의 시를 담은 거대한 캔버스가 걸려 있다. 미당 서정주의 '추일미음(秋日微吟)'중 일부다.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蜀葵(접시꽃)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제발 화창한 이 가을날, 남에게 빨간 오물을 덮어 씌우는데 힘쓸 게 아니라 지난 한 해 나 자신의 축적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고 또 앞날 어떤 방법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볼지 스스로 반성하고 생각하는 정치를 만들어내자.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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