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북한이 나올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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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북정책에 정통한 고위 소식통은 북한의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을 청개구리 같다고 평했다. 동으로 가자면 서로 가고 남으로 가자면 북으로 가는 게 청개구리라면 정부관리의 김정일 청개구리론은 남북대화의 지지부진에 대한 정부의 좌절감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기다리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보기에도 측은하다.

그는 마치 남북관계와 국내정치의 모든 것을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에 걸고 김정일의 답방을 '구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죽하면 열성적인 햇볕론자들까지 사석에서는 金대통령이 金위원장에게 답방얘기를 거두고 좀 강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할까.

*** 대화의 불씨만 겨우 살려

金대통령이 金위원장의 답방을 확신하는 까닭은 지난해 6월 평양에서 받은 굳은 약속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사정은 크게 바뀌었다.

미국의 정권 교체다. 지난 3월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金대통령에게 쏟아낸 북한 관련 발언이 金위원장에게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북한압살 정책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은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아주 중단할 생각은 없다.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는 북한의 경제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외자(外資)를 들여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북한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부시정부의 태도완화를 기다려 남북대화를 사실상 사보타주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달 6개월간 중단됐던 장관급회담에 나왔지만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라기보다 대화의 불씨만 살려두자는 생각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급회담에서 확인한 이산가족 상봉까지 연기하고 다음번 장관급회담 장소를 금강산으로 바꾸자고 고집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중인환시(衆人環視)속에 약속한 것을 깨는 궁색한 핑계로 테러에 대한 경계태세의 강화를 끌어댄다.

金위원장은 상하이(上海)에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4강의 수뇌들이 북한에 거듭 대화를 촉구하는 분위기도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산가족 연기를 통보하는 조평통 성명에는 잔칫집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의 소외감 같은 게 묻어났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북한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부시의 지난 16일 기자회견 같다.

부시는 자신이 6월의 정책성명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언제 어디서든지 만나자고 제의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북한은 평화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재래식 병력을 후방으로 돌리고, 대량살상무기 수출의 중단을 약속하라고 촉구했다.

부시는 특히 북한 주민들이 굶주린다면 굶주리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金위원장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것은 김정일이 제 나라 국민도 먹여살리지 못하는 독재자라는 평소의 고정관념을 드러낸 것이다. 김정일이 보기에 부시의 북한인식은 지난 3월 그대로다.

문제는 金위원장이 부시정부에 대한 불만과 반발을 남한을 상대로 터뜨린다는 데 있다. 미국에 압력을 넣으려면 남북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의 카드가 더 효과적이라는 게 한국 햇볕론자들의 생각이다.

북한.중국.러시아의 북방 3각관계의 강화로 金위원장이 얻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미국에 대한 태도에는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 확고부동한 미국측 입장

부시의 6월 대북 정책성명과 16일의 기자회견, 그리고 토머스 허버드 미국대사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일자) 내용을 들여다보면 북한에 대한 부시정부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조건 없이 만나서 재래식 병력의 재배치와,핵과 미사일의 통제를 논의하자. 상호주의는 요구하지 않는다. 핵과 미사일 합의는 검증돼야 한다.

이제 金위원장의 선택만 남았다. 미국은 급할 것도 없고 테러와의 전쟁으로 대북정책은 우선순위에서도 밀린다.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청개구리같이 이랬다 저랬다를 거듭하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불신만 키운다. 북한에는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승인'이 필요하다.

金위원장에게 진정으로 북한체제를 정상궤도에 올려 놓고 북한 백성들의 최소한의 의식(衣食)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다면 장쩌민(江澤民)과 푸틴까지 나서서 등을 떠밀 때 대화의 테이블로 나와야 한다. 더 기다려도 미국쪽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반면에 金대통령도 金위원장이 스스로 오겠다고 할 때까지 좀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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