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문제별로 방화벽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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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한은 한.일 외교관계 정상화의 길은 열었으나 우리 국민의 마음을 여는 데는 실패했다.

어렵사리 이뤄진 양국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일간에는 상당 기간 냉랭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정부는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을 수락하면서 그가 역사교과서 문제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해 '진전된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크게 진전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이즈미 총리는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마음으로부터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갖고 여러 전시, 시설, 고문의 흔적을 참관했다"고 자신의 역사 인식을 표명했다.

그것은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는 물론 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오부치 총리 발언 수준을 넘지 못한다.

*** 미흡한 日총리 반성 ·사죄

그는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재수정은 물론 내년의 고교 역사교과서, 4년 후 중학교 역사교과서 재검정과 관련해 어떤 언급도 피했다. 다만 양국의 역사학자와 전문가로 구성된 역사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해 올바른 역사기술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장기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연전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활동했던 '한.일 역사연구촉진 공동위'의 건의를 진전시켜 보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역사공동위는 ▶역사 자료와 기초정보에 대한 접근방법 개선▶역사 연구 인재 육성▶한.일 역사연구회의 설치▶역사교재 개발에 관한 협력▶역사에 관한 풀뿌리 레벨 교류 확대 등 5개항을 양국 정부에 건의했었다.

이중 역사교재의 개발에 관한 협력 항목에 양국의 역사학자가 '한.일관계사'나 '아시아의 역사' 등의 역사개설서를 공동으로 집필, 편찬하는 등의 가능성을 검토하자는 매우 조심스런 건의가 담겨 있다. 이 역사개설서는 교과서가 아닌 일반 역사책을 의미한다.

이런 상식적인 건의조차 조심스럽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측의 자세가 극히 조심스럽고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제안한 한.일역사공동연구기구가 발족된다 해도 일본측의 기본적인 소극성에 비추어 눈에 띄는 신속한 성과를 기대하긴 쉽지 않다. 오히려 일부 양국 역사학자 간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공동 저술작업이 정부 레벨의 관심표명으로 보다 조심스러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언급을 피했다. 다만 "누구라도 참배가 가능한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해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분사(分祠)하는 방안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 국내의 반대가 완강해 성사 여부가 매우 불투명하다.

이렇게 하나 하나 따져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으로 최근 한.일관계에 불신과 대립을 가져왔던 원인 중 어느 하나도 말끔히 해소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을 받아들인 것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원래 한.일관계는 양국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항상 어느 구석에서 문제가 터져 국민 감정이 자극될지 모른다. 그때마다 양국관계의 기조가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처하더라도 그것이 한.일관계 전반을 흔들게 해서는 정상적인 한.일 외교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 역사 왜곡 대응 지속돼야

한.일 간에는 독도나 역사문제뿐 아니라 경제협력.무역.안보협력.국제사회에서의 공조.인적교류 등 여러 중요한 협력 분야가 있다.

독도 문제나 역사문제가 터졌다고 해서 다른 모든 관계가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외교도 아니다.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선 문제마다 방화벽(防火壁)을 쳐 설혹 어떤 문제가 터지더라도 전반적인 관계의 손상으로 파급되지 않게 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이와는 반대로 한.일 양국의 전반적인 관계만을 고려해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을 완화해서도 안된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문제 제기와 일본 문화 개방스케줄의 현단계 동결 등의 직접 대응 조치는 일본측이 이 문제에 대해 가시적 성의를 보일 때까지는 철회하지 말고 꿋꿋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성병욱 <중앙일보 고문.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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