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한국인의 가족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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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얼마 전, 거래처의 직원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가족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직원의 형은 제조업을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체의 사장인데 지난 경제위기 때 회사가 거의 부도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한다.

회사가 부도 나기 직전 형은 동생에게 찾아와 회사가 부도 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동생은 형이 집에 생활비도 가져 가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집 문서까지 잡혀 兄 도와

동생은 자기 재산이라고는 15년간의 회사생활을 통해 모은 돈으로 산 아파트 한 채가 전부인데 그걸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도록 그 집 문서를 형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달부터 약 1년 남짓 자기가 받는 월급의 일정 부분을 형수에게 보내 줬다. 가족의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이 말을 듣던 나는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인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모나 자식 관계도 아니고 각자 다 결혼해서 자녀까지 있는 상태의 형제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설령 부모나 자식 사이라 할 지라도 살고 있는 집이 전 재산인데 그걸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리도록 집문서를 내 줄 서양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내와 상의는 했는가? 그 이후 형의 사업은 좋아졌는가?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은 괜찮은가? 그 동안 보태준 생활비는 돌려 받았는가? 만일 형이 망해 집이 없어지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등등.

그 직원의 아내도 형을 도와주는 일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히 그 직원의 형은 그 때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 현재는 집문서를 되돌려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동안 보태준 생활비는 돌려 받지 않았다고 했다. 형이 망하면 어떡할 뻔했느냐는 질문에 "할 수 없죠. 다시 시작해야죠"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 직원은 형제 사이는 돈보다 우애가 훨씬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형제라면 서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정도는 도와줘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그런 어려움에 처했다면 자기 형도 형의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자신을 도와 줬을 것이란 얘기를 들려줬다.

해마다 추석 때가 되면 한국의 도로는 귀성객들로 주차장이나 다름없이 변하곤 한다. 서울에서 부산 혹은 광주까지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 열다섯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보도를 이맘때면 늘 접하곤 한다.

왕복 시간을 따져 보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척 길어서 서울에서 미국의 웬만한 도시를 다녀오는 시간과 거의 비슷할 정도다. 명절 때의 서울은 오히려 한가하고 조용해 한국에 오랫동안 거주한 외국인들 중에는 이때 서울에서 휴식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명절 때마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고생을 하면서 고향을 찾아 가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명절 휴일이 길어야 4~5일인데, 오가는 시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같이 보내는 시간은 무척 짧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시간의 운전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물론 미국인에게도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은 한국인들의 추석이나 설날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는 뜻깊은 명절이고 실제로 이 때를 가족과 같이 보내기 위해 많은 이동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경우처럼 그 시간의 대부분을 길에서 보내고 가족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귀성을 해야 된다면 명절 때 고향을 찾는 미국인이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 명절 마다 찾아가는 고향

한국에서 5년 넘게 산 지금, 나는 자신의 전 재산을 거침없이 줄 수 있는 형제간의 애정,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명절 때 고향의 어른들을 찾아 뵙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 등 한국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이해나 감동의 차원을 넘어 존경심마저 갖곤 한다.

이런 가족간의 사랑이야말로 세상과 사회를 밝게 하고 발전시키는 '한국인의 진정한 가치' 라고 생각한다. 물질만능의 시대가 되면서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가족 간의 가치가 변한다 할지라도 한국인의 이런 아름다운 가족 사랑은 지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웨인 첨리(다임러크라이슬러 코리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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