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8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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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4. '역사선생' 역할

묘엄(妙嚴)스님은 56년이 지난 지금도 성철 스님이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던 한국사 도표와 사미니계첩 등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도표(사진)를 보면 성철 스님이 묘엄 스님과의 약속에 따라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와 각종 문화상식까지 일일이 교재를 만들어가며 자상하게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도표를 보면 고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 이름과 초대 임금, 도읍지, 유명한 장군과 신하, 이밖에 사학자들 사이에 쟁점이 되고 있는 사항까지 소상하게 적어놓았다.

아무런 참고서도 없는 절간에서 성철 스님은 순전히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묘엄 스님에게 방대한 한국사 도표를 그려준 것이다. 도표는 주요 사건이나 중요한 개념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형식. 해방 직후인 1945년 말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사인 일제 치하에 대해 정리한 '40년간 노예생활' 이란 항목의 예.

'제1차 세계대전 파리 강화회의-미 대통령 윌손씨의 민족자결론-기미년 3월 1일 독립만세-손병희외 33인-상해임시정부수립-대통령 이승만박사-국무총리 안창호-광주학생사건-지나사변-대동아전쟁-일본의 무조건항복-조선의 완전해방-임시정부주석은 김구선생'

묘엄 스님을 가르친 성철 스님은 또 직접 사미니계를 주기까지 했다.

"윤필암에 법상(法床)을 차려놓고 성철스님이 와 사미니계를 주셨지요. 성철스님은 '내가 평생 동안 절대로 계를 설하지 않기로 했는데, 청담 스님 딸이니까 특별히 요번만 계를 설한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고 말했습니다. 성철 스님께 직접 계를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저 하나뿐입니다. "

성철 스님은 큰 종이에 '묘엄' 이라는 법명을 써 건네주었다. 성철 스님은 여러가지 자상한 부탁도 아끼지 않았다.

"옛날 조사(祖師.종단이나 종파를 일으킨 고승) 스님들은 뭐든지 다 잘하셨제. 모두들 삼장(三藏.경.율.논의 세가지 불교학 분야)에 능통했지. 공부 열심해 해야제. 그라고 옷은 다 떨어진 거 입더라도 마음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된데이. "

성철 스님이 묘엄 스님에게 이런 정성을 기울인 것은 청담 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그만큼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 가까웠다. 묘엄 스님이 들려주는 두 분의 인연.

"청담 스님이 수덕사에서 처음 성철 스님을 만날 때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지요. 만공 스님, 용운 스님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오는 기척이 나더랍니다. 그러니까 용운 스님이 문구멍으로 내다 보시더니, '아!

저 괴각쟁이, 괴각쟁이 온다' 고 하더랍니다. "

괴각(乖角)이란 괴짜란 말인데, 이미 당시 성철 스님은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청담스님은 속으로 '괴각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인간이 되려는 사람인가 보다' 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만공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오는 길에 성철 스님과 얘기를 나눠본 청담 스님은 "괴각쟁이와 괴각쟁이끼리 뜻이 딱 맞더라" 고 기억하곤 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의기가 투합해 10년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성철과 청담, 두 스님은 한국불교의 내일을 두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장시간 토론을 벌이곤 했다. 묘엄 스님에 따르면, 대승사에 같이 머물던 시절 두 스님은 "지금 같은 말법(末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말 없는 가운데 수행의 경지를 풍길 수 있는 중이 되자" 는 등등 얘기를 하면서 밤을 새기도 했다.

"그런 논의 과정에서 두 스님은 역할을 나누셨는가 봅니다. 성철 스님은 종단 일에 직접 참여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참 중은 그래야 마땅하다' 는 어떤 정신적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지요. 반면 청담 스님은 직접 종교계의 정화작업 일선에 뛰어들어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으며 혼신을 다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 분들의 열정을 옆에서 지켜본 시절은 참 행복했습니다. "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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