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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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어머니는 피란을 내려와서도 장을 보러 갔다가 큰 서점을 발견했다면서 내가 읽을 책들을 사왔다. 지금 책 제목들이 생각난다. 문지기 아들 브레에스, 방정환의 소년소설집, 톰 소여의 모험, 몬테크리스토 백작, 플루타르크 영웅전, 안데르센과 그림 동화집. 대구 거리에서는 긴박한 전선의 보충병을 모집하느라고 피란민이고 학생이고 닥치는 대로 검문하고 모병을 했으며, 전쟁 중인데도 봄이 되자마자 학교를 열고 피란민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나도 집 근처의 중앙초등학교에 갔는데 교사는 벌써 미군 부대로 징발당해 있어서 가교사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어느 적산가옥의 방과 마루 사이의 벽들을 모두 털어내고 공간을 넓게 고친 교실이었다. 물론 책상.걸상은 없었다. 나중에 책상 앞의 걸상에 앉아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겨우 졸업하기 몇 달 전에야 소원성취를 할 수가 있었다. 학생들은 누구나 화판과 신발주머니와 방석을 장만해야 했다. 화판에 끈을 매어 어깨에 걸고 가교사로 가서 공부할 때에는 화판을 무릎에 펼쳐놓고 앉아서 글씨를 썼다. 가교사의 바닥은 그래도 좀 나은 곳은 마루였고 아니면 시멘트 바닥이거나 그냥 맨땅이었다. 마루에서도 방석이 필요했지만 가마니를 깔아놓은 시멘트나 맨땅에서는 방석을 깔고 앉아도 장마철에는 눅눅한 습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오면 곧잘 비가 샜다. 처음 입학식을 하는 자리에서 영등포에서 담임을 맡았던 여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반겼고 어머니도 여선생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울었다. 그런 난리통에 서로 살아있다는 것이 고마웠을 것이다. 학교에 가기 전부터 중학생 아이들이나 읽을 책들을 보아온 내게는 학교 공부가 별로 재미가 없었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거의 다 아는 것들이었다. 영등포에서처럼 사범학교 여학생들이 교생을 나와서 우리의 수업을 도와주었다. 사투리를 쓰긴 했지만 "어찌나 음전하고 어른스러운지"라고 어머니는 여학생들을 칭찬했다. 어머니는 늘 얘기했다.

-어디서나 배우고 가르치는 데는 우리네 사람들 못 따라간다. 훗날에 그 덕으로 광을 내게 될 거야.

교실의 절반을 나누어 한쪽에 남녀 학생을 따로 앉혔다. 그래도 누나들 이외에 처음으로 또래의 계집아이들과 서로 이름도 부르고 말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전선에서는 피투성이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화판을 들고 나가 과수원 언덕에 앉아서 크레용으로 나무와 꽃들을 그렸다. 아버지는 한 달에 절반쯤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반장이 되었던 덕분인지 그때 말로 동무들이 많이 생겼다. 전쟁 뒤에 저쪽 사람들이 동무라는 말을 '혁명적'으로 사용했던 탓인지 친구라는 한자말로 바꾸어 버렸지만 노랫말에도 모두 동무라고 했다.

-동무들아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동무들아 나와서 같이 놀자 어여쁜 꽃들이 방긋이 웃는다….

하는 식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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