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8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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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80. 한문 편지 대독 ·대필

성철 스님은 1940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을 부른 뒤 곧바로 금강산 마하연으로 걸망을 지고 떠났다. 금강산 마하연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수행처로 많은 스님들이 그 곳에서 정진하길 희망했다.

그만큼 선방(禪房)의 규모도 컸다. 선방 스님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마하연 선방이 얼마나 넓은지 끝에 앉아 참선하는 스님은 안거(安居.외부출입을 않고 수행만 하는 기간) 한철(90일)을 나고도 다른 쪽 끝에 있던 스님의 얼굴을 모른다' 고 할 정도다.

안거가 끝나면 만행(萬行.여름철 안거와 겨울철 안거 사이에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수행하는 것)에 들어가는 선승(禪僧)들은 길 가다가 서로 마주치면 "지난 철 어디서 났습니까" 하고 서로 묻는다.

그런데 마하연 말석을 차지했던 스님들은 서로 얼굴을 몰라 "마하연에서 한철 났다" 고 서로 확인해야할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 가운데는, 마하연 선방의 스님들이 서로를 몰라 볼 정도로 열심히 수행에만 몰두했다는 의미도 들어있을 것이다.

어쨌든 성철 스님은 마하연에서 적지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중 한가지가 어머니와 금강산 유람한 얘기인데,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다른 하나는 편지 얘기다.

성철 스님은 소학교 입학 전에 서당에 다녔고, 장성해서도 한학을 했기에 한문으로 글을 쓰고 읽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조선시대 이후 오랫동안 승려들이 천민 취급당해온 상황에서 보통 스님들 중 한문을 마음대로 읽고 쓰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성철 스님은 매우 귀한 존재였다.

당시 대부분 편지는 한문, 그것도 읽기 힘든 초서(草書)로 썼다고 한다.

편지를 써보내는 사람도 어차피 한문을 모르니 동네 훈장에게 "아무개에게 이런 저런 내용의 편지를 써 달라" 고 부탁하기 마련이고, 훈장은 또 어차피 편지를 받는 쪽에서도 누군가 대독(代讀)해주리라 믿고 자기의 글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초서를 갈긴다. 그런 문화 속에서 선방 스님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성철 스님에 대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철(徹)수좌가 공부를 많이 해서 초서를 읽고 쓸 수 있다더라. "

당시 성철 스님의 선배나 동료격인 스님들은 성철 스님의 법명 끝자를 따서 '철수좌' 라고 불렀다. 적지 않은 절집 식구들이 모두 편지를 들고 시도 때도 없이 성철 스님을 찾아와 "읽어달라" "써달라" 고 부탁했다.

성철 스님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대독.대필해 주었다. 그다가 점차 소문이 퍼지다보니 나중에는 하루종일 답장을 써도 모자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이었기에 선방 스님들끼리 모여 회의하는 모임에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부터는 스님들 편지 보지도 않고, 써주지도 않을 거니까, 모두 그래 알고 계시이소. "

야단이 났다. 여기저기서 원망의 소리가 높았다.

"글 좀 안다고 스님들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 무슨 급한 일이나 큰 일이 있는지 모르는데 그걸 좀 가르쳐 준다고 해서 뭣이 탈이 난다고 그러는가. "

그렇다고 굽힐 성철 스님이 아니다.

"그라만, 내가 공부할 때 스님들은 뭐 했소? 내 공부하는데 돈 한 푼 보태줬소, 쌀 한 바가지 보태줬소? 다시는 편지 안 보고 안 쓸테니께 그래 알고 아무 말 마이소. "

그런 태도에 섭섭해한 많은 스님들이 성철 스님을 멀리할 정도였는데, 성철 스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수행에만 전념했다.

성철 스님에게 더 큰 어려움은 추위와 폭설이었다. 겨울에는 어찌나 눈이 많이 오는지 눈 속에 굴을 파고 생활하는 게 이만저만 힘들고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남쪽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성철 스님은 그런 추위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다음해 여름까지만 나고, 겨울엔 경북 은해사 운부암으로 옮겼다.

성철 스님은 그 곳에서 평생의 법우(法友)인 향곡 스님을 만났다. 두 분은 동갑으로 풍채도 비슷하니 당당하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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