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덕분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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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02면

이런 걸 ‘덕분’이라고 해야겠죠. 화산 폭발 덕분에 런던에 닷새나 더 갇혀 있다 돌아왔습니다. 갇혀 있던 덕분에, 마음은 초조했지만, 곳곳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대영 박물관, 테이트 모던,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 그리고 크고 작은 갤러리들…. 웬만한 출장 일정으로는 제대로 가보기도 힘든 곳이죠.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인파와 마주쳐야 했던 것은 관광객들 발이 묶였기 때문일까요, 이들 미술관·박물관이 무료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

특히 얼마 전 개·보수했다는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을 둘러보면서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알버트공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일 출신의 알버트공은 1851년 5월 1일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주도한 인물이죠. 당시 이 박람회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부와 기술을 상징하는 이벤트였습니다. 하이드 파크에는 길이가 1851피트(약 560m)에 달하는 유리 철근 구조물(크리스털 팰리스)이 세워졌고 1300여 기업이 출품한 제품들이 그 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공은 그 광경을 보며 ‘앞으로는 예쁜 것, 편한 것, 신기한 것의 세상이 될 것’을 예견했다고 합니다. 1866년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을 과학박물관 옆에 짓고 만국박람회 전시품과 왕실 소장품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정한 이유가 그렇다네요.

이들 부부의 비전 덕분에 영국은 문화강국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죠. ‘쿨 브리태니아’를 외치며 현대 미술·패션·디자인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이유가 이미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무리 지어 작품을 감상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비전을 제시한 조상 덕분에 어려서부터 좋은 작품을 곁에 두고 보게 된 이 아이들이 자라면 또 어떤 비전을 제시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로부터 ‘조상 덕분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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