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7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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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70. 쉽지않은 원주 노릇

원주 소임을 맡을 당시 백련암에는 스님들이 대여섯명 정도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신도들의 찬거리까지 장만하려면 여기저기 열심히 들러야 한다. 스님이 몇 되지 않아 누굴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사정도 잘 모르면서 혼자서 돌아다니니 제대로 물건을 사지도 못했다.

물론 들르는 곳이야 주로 채소가게뿐이고, 채소가게라야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길바닥에 줄지어 앉아 채소를 늘어놓고 한줌씩 파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느 채소가 싱싱한지 둘러보고 대충 마음 짚이는 곳에 가서 물건을 샀다.

그런데 첫눈에 분명히 제일 좋고 싱싱한 채소를 샀다 싶어 기분이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일어섰는데 다음 모퉁이를 지나다보면 내가 산 물건보다 더 좋은 것이 또 값까지 싸게 부르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속이 상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좀 더 둘러볼걸…" 하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장보기가 별로 즐겁지 않은지라 그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빨리 물건을 살 것이 아니라 둘러보고 남들이 산 뒤에 더 좋은 것을 사자" 고 다짐을 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보면, 언제 사갔는지 웬만큼 좋은 물건은 남들이 먼저 다 사가버리고 파장에 남은 것만 사오는 꼴을 면치 못했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시장이 서고 처음 한두 시간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다가 그 시간쯤 되면 여기 저기서 흥정이 시작되고 물건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련암까지 올라와야 하는 나는 마음 느긋하게 맴돌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물건 좋다 싶은 곳에서 흥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다른 아주머니들이 몰려들곤 했다. 물건 구경하던 사람들이 스님인 나를 보고 "무슨 좋은 물건인가" 하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흥정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시선들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질 무렵 장을 보고 나오다가 국일암 성원스님과 마주쳤다. 국일암은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비구니 암자. 나이가 많은 성원스님은 국일암 살림을 맡아 장을 보러나오곤 했다.

"스님, 오늘 장 잘 봤소. "

가까이 살기에 평소 안면이 있는 노비구니 스님이라 무심코 "예, 잘 봤심더"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성원스님이 "어디 걸망 한번 봅시다" 며 쓱 다가온다. 이리저리 보더니 묻는다.

"이거 전부 얼마 주고 샀소. "

곧이 곧대로 쓴 돈을 추산해 말했다.

"아이구!

스님요,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물건 사는 데 그렇게 값을 많이 주면 우짜겠노. "

성원스님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내가 시장 보는 것 한번 구경하고 다음부터는 장을 잘 보소" 하면서 나를 다시 시장으로 데려갔다. 가지를 한 무더기 살 경우, 흥정하면서 서너 개 더 놓고, 또 돈을 주면서 두 개 더 얹는다. 다시 걸망에 챙겨 넣으면서 세 개를 더 넣는 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장 볼 돈의 반만 쓰면서도 더 물건을 많이 사 가는 것이다.

"장은 이렇게 보는 거라요. 스님 알겠소?"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왔다. 이후부터 장날에 성원스님을 만나 "오늘 장 잘 봤소" 라는 질문을 받으면 걸망을 열어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에 실제로 내가 지불한 돈의 절반 정도로 샀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제서야 "스님도 이제 장 볼 줄 아네" 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쑥스러워 나중에는 장터거리에서 성원스님을 보면 아예 멀리 돌아서 줄행랑을 놓곤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5일장을 찾아다니며 스님들을 위해 부지런히 사서 날랐는데, 성철스님은 반응이 없다. 나중에 알고보니 열심히 장에 다니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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