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정치인 봐주는 '자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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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 전진배 사회부 기자

15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실.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에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정치인인 데다 적지않은 액수 때문에 처리에 관심이 모아졌다.

"불법 자금을 7억원씩이나 받았는데 어떻게 처벌은 안 합니까."(기자)

"선거자금 명목이거나 직무 관련성이 없어 뇌물죄를 적용할 수 없어서…."(검찰)

"그럼 무슨 명목입니까."(기자)

"선거 준비용입니다."(검찰)

검찰이 1억~7억원을 받은 정치인 3명을 정치자금법상 공소시효(3년)가 지나 불기소한다고 발표하자 기자들의 질문이 잇따랐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10년인 특가법상 뇌물죄를 적용하면 처벌할 수 있지만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아 뇌물죄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검은돈을 수억원씩 받은 정치인들에게 모두 면죄부를 줘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이지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법이 정치인을 봐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공무원은 100만~200만원만 받아도 업무연관성이 명확해 뇌물죄로 처벌받는다. 반면 정치인은 대가성 여부가 확실치 않아 뇌물죄보다 처벌이 훨씬 가벼운 정치자금법의 적용을 받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기업인이 정치인에게 순진하게 "정치나 잘 해달라"며 한두푼도 아닌 수억원씩을 건넸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국민의 법 감정과 크게 동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처벌 당위론을 앞세워 무리하게 뇌물죄를 적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법조계에서는 정치인들의 세비와 후원금을 현실화하는 대신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은 뇌물죄의 수준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야만 '선거자금 명목''명절 떡값''대가성 없는 성의 표시'라는 판에 박힌 말로 거액을 거리낌없이 받는 정치인들을 근절할 수 있다.

전진배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