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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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가 기억하기로는 '오산'역이라 씌어 있는 팻말과 거기서 저녁으로 차디찬 김밥을 사먹었던 게 생각나기 때문이다. 김밥이나 주먹밥이 끼니의 전부였다. 밤늦게 기차가 출발할 때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순간에 기다리다 지쳐서 식구 중의 누군가가 잠깐 내린 사이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붕 위의 남은 식구들은 아우성을 치며 가족의 이름을 부르고 난리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사이에 빠르면 사오일, 길면 열흘이 넘게 걸리던 여정에서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화차의 지붕 위에 쪼그리고 앉아 졸다가 기차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다. 누군가는 철로를 따라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오기도 하고 끝내 뒤처져 버리기도 했다. 물정을 아는 사람은 온갖 어려움 끝에 가족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오랫동안 헤어지게 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잘 아는 친구도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진작에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 가족과 오순도순 사는 일에 서툴렀고 규칙적인 일을 하는 직장을 갖지도 않았다. 시속 말로 위인이 양아치라서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랬다지만 그가 그림 한 가지만은 열심히 그리고 만들고 하여 기대를 했더니 역시 생활이 견실하지 못해서였는지 암으로 죽고 말았다. 그가 기차를 놓친 경우였다. 당시 서울 살던 사람들은 용산역까지 나가서 피란민 수송열차를 타든가, 몇 식구가 돈을 걷어서 재간껏 후생사업에 나선 군용 차편을 얻어 타거나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역에서 식구들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정거장 구내에서 식구들과 하얗게 모여든 피란민들 틈에 섰다가 뒤를 보러 변소를 찾아다녔고, 철로를 몇 선이나 뛰어넘어 철조망 가녘에 가서 쭈그리고 일을 보고 돌아오니 기차가 떠나버렸다고 한다. 나와 동갑내기이던 그 친구는 울며불며 빈 철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하는 수 없이 식구들이 버리고 떠난 집으로 되돌아갔다. 집에는 병들어 시난고난하던 할머니가 안방에 누워 있었다. 길에서 죽느니 차라리 집에서 죽겠다며 한사코 피란을 거부했던 할머니였다. 그는 집에 와서야 그와 할머니를 버리고 떠나버린 식구들에게 분노가 치밀었고 못내 커서까지도 용서할 수 없었노라고 했다. 그해 여름과는 달리 서울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해 겨울은 엄청나게 춥기도 했다. 전쟁 통에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부모들이 흩어지고 빈 도시에 버려진 아이들이 서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어떻게 해서든지 할머니와 자신이 자는 안방의 군불을 때서 구들을 데우는 일이었다. 그는 빈집들을 찾아다니며 땔 만한 가재도구들을 모아 오고 식구들이 남기고 간 한 자루의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곡식 한 톨이라도 확보를 해오려고 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나이 순서대로 병정놀이를 할 때처럼 서열이 생겼다. 그들은 패를 나누어 집뒤짐을 하러 다녔다. 중공군은 저희 주둔지 부근에만 있거나 남쪽 외곽에 있었고 인민군도 군사적인 일 외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 중에는 그해 겨울에 이북 사람들은 양식 배급조차 해주지 않았다고 기억하지만 사실 그들은 폭격 때문에 저희 먹을 것을 보급하는 데도 급급했을 것이다. 남이나 북이나 그맘때에는 도시가 거의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해 봄이 오기도 전에 어린 그가 떠넣어 주던 미음만 누워서 간신히 넘기던 할머니가 죽는다.

그림=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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