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TV 중독증' 걸리는 어린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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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초등학교 5학년 영훈(가명)이는 두 달 전부터 서울 강남의 한 소아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병명은 'TV 중독증' . 영훈이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리모컨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영훈의 부모는 처음엔 아이가 얌전하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영훈이는 가족과의 대화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대신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영훈이의 경우는 심한 경우이지만, 실제로 상당수 어린이들이 어느 정도의 TV 중독에 빠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문제는 우리가 아이들을 TV와 완전히 격리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접하는 우리 TV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방송위원회가 지상파 방송사 5곳의 어린이 프로를 분석한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어린이 대상 프로는 10개 중 7개 꼴로 애니메이션이며, 그중 절반이 일본산이다. 뉴스.코미디.토론.토크.문화예술 등 다양한 장르는 가뭄에 콩 나듯 적다. 게다가 시청률 때문에 프로그램 편성 시간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내용은 또 어떤가. 아직도 선과 악이 대립하는 흑백논리식 전개에다, 갈등의 해소 수단은 어김없이 폭력이다. 특히 어린이들은 주말에 더 많이 TV에 노출되는데(8월의 하루 평균 시청시간 1백72분), 이때 어린이 프로는 평일보다도 줄어든 2~3개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방송위는 ▶다양한 소재 개발 ▶어린이 프로 전담PD 양성 ▶쿼터제 도입 등의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청률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방송사의 근본적 입장 선회 없이는 역시 공염불에 그칠 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 프로 'Sesame Street' 를 제작한 미국의 프로덕션 'CTW' (Children Television Workshop)는 TV를 어린이 교육의 주요 통로로 인식하고 있다. 저소득층 및 소수 집단 어린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철학도 자랑한다.

일본 요미우리 TV엔 '어린이 프로그램 심의회' 가 있어 어린이들의 의견과 감상을 제작에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린이가 있는 곳에 TV가 있다면, 이미 그 아이는 어린이가 아니다' 라는 속설만 방송가에 떠돌 뿐이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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