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환생해도 내 해석에 고개 끄덕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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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설탕’‘담배’‘크림’. 지휘자 로저 노링턴(76)이 전화 인터뷰에서 ‘비브라토(vibrato)’에 비유한 기호품들이다. ‘떨림’이라는 뜻의 연주 기법이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왼손가락으로 현을 짚어 흔드는 식이다. 미세한 떨림이 음을 풍성하게 하고, 음악을 보다 감정적으로 만들어 연주자의 필수 테크닉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노링턴은 비브라토에 대한 호의적 생각과 수십년동안 싸웠다.

지휘자 로저 노링턴은 “나의 해석이 많은 논쟁에 휘말리는 걸 알고 있다.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그는 이 길을 12년동안 함께 한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과 다음 달 내한한다. [성남아트센터 제공]

노링턴은 1970년대부터 비브라토 없는 연주를 오케스트라에 주문했다. “바흐는 물론 베토벤·모차르트 시대에는 비브라토를 권장하지 않았다. 30년대부터 오케스트라들이 음악을 ‘떨면서’ 연주했다”는 것이다. 노링턴은 “‘담배’ 혹은 ‘설탕’과 마찬가지로 유행처럼 번졌지만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 비브라토”라고 설명했다. “비브라토 대신 음의 본질을 살려내는 연주는 ‘금연 지역’과 같다”는 비유도 덧붙였다.

실제로 그의 음악은 담백하다. 속도도 빠르다. 노링턴은 “박자 세는 기계인 메트로놈이 보급되기 이전의 베토벤은 훨씬 빠른 속도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연주에 속력을 냈다. 80년대 중반에 그가 녹음해 낸 베토벤 교향곡 음반들은 경쾌하고 가벼운 해석으로 화제가 됐다. 베토벤 9번 심포니는 선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보다 12분 짧았다.

과감한 해석에는 찬반이 분명히 갈렸다. 노링턴이 음식에서 ‘크림’을 걷어내듯 비브라토를 걷어내자 일부 음악 팬들은 담백함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너무 빨라 언제 박수를 쳐야할지조차 헛갈린다’는 혹평도 나왔다.

베토벤 뿐 아니다. 말러·브루크너 등 노링턴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극과 극의 평이 오간다. 노링턴은 이에 대해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나의 해석이 지금까지 스타일과 다르기 때문이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이 느린 것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음악에도 과학적·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은 새로운 작품을 연주할 때마다 음악학자와 충분히 상의하고 문헌·역사 등을 철저히 조사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신념은 1962년 슈츠 합창단을 창단한 후 시작됐다. 바흐 이전 시대의 작곡가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tz, 1585~1672)의 작품을 연주·녹음했던 그는 “참고로 할 연주나 녹음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했다. “바흐·헨델만 해도 많이 연주되지만 쉬츠에 대한 해석은 희귀했다”는 것이다. 이미 나와있는 녹음이나 연주를 모방하는 대신 객관적 자료를 찾아야 했던 이유다. “음악적 해석에도 유행이 있는데, 이를 좇기 보다는 작곡가가 환생해서 들어도 고개를 끄떡일만한 연주를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수십년동안 논란의 중심에 섰던 노링턴은 다음달 초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선다. 98년부터 이끌고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 하이든·드보르자크를 연주한다. 새로운 논쟁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화제가 됐던 모차르트·베토벤 등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 작품들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늘 익숙한 음식만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호정 기자

▶ 로저 노링턴과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5월 6일 오후 8시 성남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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