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 신사참배] 외교파국 막고 내치 명분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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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가 13일 전격적으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것은 국내 정치와 외교를 모두 풀려는 '두마리 토끼 잡기' 작전이었다.

고이즈미가 "총리가 일단 말한 발언을 철회하는 것은 참괴스럽지만 국익을 생각해 이같이 결정했다" 고 말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공언한 대로 15일에 갈 경우 한국.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파국상태에 이를 것이 뻔하고, 가지 않으면 국내정치적 신뢰도가 추락하는데다 정치적 기반인 우익세력의 반발이 확실해 궁여지책 끝에 '전격 사전 참배' 란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사실상 공식 참배함으로써 침략전쟁을 정당화했다는 비난과 함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됐다.

또 한.중이 거세게 비난하고 있어 동북아 외교전선은 우익교과서 문제 등과 겹쳐 장기간 냉각기에 접어들 전망이다.

◇ 연립정부 내 관계를 고려해 택일=자민당 내부에서조차 한국.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맹우(盟友)인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자민당 간사장.가토 고이치(加藤紘一)전 간사장도 11일 고이즈미에게 날짜변경을 요구했다. 인기정치에 힘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고이즈미로서는 15일 참배를 강행할 경우 정치적 지지기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컸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대표는 "15일 참배 강행은 국민의 실망감을 불러오고 위화감을 일으켜 개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고 말한 바 있다.

지지(時事)통신은 "참배를 강행했으면 연립정부가 흔들리는 등 상당한 후유증이 있었을 것" 이라고 보도했다.

◇ '사실상 공식 참배'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가 총리 자격으로 공식 참배한 것인지, 개인 자격인지를 구분하지 않았다.

공식 참배라고 밝히면 정교분리를 명시한 헌법 제20조에 위배되고 한.중의 반발이 확실하고, 개인 자격이라고 하면 그동안 "공식 참배하겠다" 는 말을 뒤집는 셈이 된다.

고이즈미도 애매모호하게 어물쩍 넘어가는 방법을 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신사에 봉양한 꽃의 비용 3만엔을 개인 돈으로 지불하지 않고 참배하면서 신도(神道)형식도 취하지 않아 개인 자격 형식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신사 참배자 명단에는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라고 적었고, 꽃의 헌화자 이름도 그렇게 적었다.

관용차를 이용하고 총리에 준하는 경호가 뒤따르는 등 실질적인 내용은 공식 참배였다. 또 총리의 행동을 사적.공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많다.

◇ 일본의 움직임=주일 외교소식통은 "일본 정부가 한국.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관계개선 움직임을 취할 것" 이라고 내다봤다.

고이즈미도 성명에서 "상황이 허락하면 가능한 한 이른 시간 안에 한국.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 아시아.태평양의 미래.평화.발전에 대해 협의하고 싶다" 고 말해 한국.중국을 방문할 의향도 비췄다. 아베 신조(安倍晋三)관방부장관도 고이즈미의 특사파견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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