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로 ‘소화전’이라고 쓰고, 설명이 복잡한 현재 소화전(왼쪽). 가로 글씨로 ‘소화전’이라고 적고, 이해하기 쉽게 사용 설명을 그림문자로 표현한 개선안(가운데·오른쪽).
그러나 정작 사용법을 전달하는 데는 무심합니다. 강판함에 세로쓰기로 ‘소화전’이라고 쓰여 있을 뿐 구체적인 기능과 작동 방식을 알기 어렵습니다. 함의 외부 또는 내부에 사용법이 부착돼 있지만 그마저 ‘관창’ ‘화점’ 등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고 상용되지 않는 용어들을 쓰고 있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디자이너 김경선은 소화전의 난해한 사용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개선했습니다.
법률이 색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각적 각성 효과가 큰 빨간색 타입과 공공건축물의 벽이 대개 흰색임을 감안해 밝은 회색 타입을 제안합니다. 소화전이라는 글씨도 자연스럽고 보편화된 가로쓰기로 바꾸었습니다. 사용법은 기존의 긴 설명문 대신 문자 수를 최소화했습니다. 4단계의 픽토그램(그림문자)으로 간략히 표현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로빈 거슨 교수가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비상시 사람들은 새로 익혀야 하는 정보보다 평소 머릿속에 있는 정보에 의존해 행동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요구되는 행동이 경험을 통해 사전에 깊이 각인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방재시설인 소화전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소 학습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이 긴급 상황에서 보이는 본능적인 행태에 맞춰 사용하기 쉽게 디자인돼야 합니다.
권영걸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