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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트러스트법(국민신탁법)' 졸속 추진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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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 사회 변화에 있어 시민운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사회운동에서 환경.문화.소비주권 등 많은 분야에서 대안과 비판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과 환경보존운동은 시민운동과 전문가의 역량에도 불구하고 개발이라는 힘의 논리에 의해 묵살되거나 귀찮은 민원성 문제로만 치부됐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정부는 문화재 행정과 환경부 행정을 규제 행정이라 칭하며 '규제개혁 철폐'라는 명분을 내세워 문화재 보호구역과 그린벨트를 풀어버렸고, 전 국토는 마구잡이 개발로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문화유산과 환경에 대한 정책과 행정은 '규제'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보험정책이다. 문화유산 보존과 환경보호운동이 규제라는 용어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훼손 현장마다 일일이 몸으로 막아내기에 한계를 느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은 국가 차원의 제도적 장치(국민신탁법=트러스트법)를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이는 성숙한 시민운동의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발족하면서 본격화된 운동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토에 대한 생태보전 대책을 추진해 푸른 한반도로 가꾸고 보령 대천수양관, 서산농장의 철새지역 등 문화적.역사적.생태적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을 민간 차원에서 보전할 수 있도록 국민신탁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2003년 5월 국무조정실은 국민신탁법 제정을 환경부 소관 중점 과제로 분류했다. 그러나 국무조정실에서 문화.역사.생태보전과 관련된 국민신탁법의 주관 부서를 문화부(문화재청)가 아닌 환경부로 분류한 것은 국무조정실의 정부 부처 주요 업무에 대한 분석 및 체계관리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법안을 준비했다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도 예산과 정책을 지원한 문화재청을 버리고 환경부와 4년간 밀실에서 준비했으며, 다양한 문화.환경시민단체와 협의하지 않았다.

특히 '국민신탁'이름을 자신들만 사용해야 하며, 모든 문화.환경단체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법안의 독선적인 문제에 대해 지적이 제기되자 그때서야 시민단체 간 협의가 시작됐고, 그 결과'국민신탁'이라는 명칭의 다양한 사용 인정과 수십, 수백개가 될 수 있는 문화.환경국민신탁 단체의 운동을 활성화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국민신탁법인을 연합체나 협의체 같은 단독 법인으로 구성하자고 합의했었다. 또한 법안 주관부서는 환경부나 문화재청보다는 국무총리실이 주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시민사회단체 간 협의는 어려움이 없었고, 원만하게 진행됐으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쪽은 국무조정실의 법안 주관부서 조정회의에서 시민사회단체 간 합의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결국 시민단체 간 협의는 무성의와 법안의 독선적 내용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의해 깨어진 판이 되고 말았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트러스트 기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푸념을 할 것이 아니라 국민신탁법 시행으로 인해 문화.환경시민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업(장사)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문화와 환경을 분리하는 행정 편의적 국민신탁법이 분명히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국무조정실과 환경부의 무리한 추진, 문화재청의 안일한 태도, 이와 더불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독선이 4중주가 된 불협화음에 기인한다. 정부는 일정에 맞춘 추진보다 다소 늦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하게 추진하기 바란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