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눈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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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옥관(1955~ ), 「눈동자」 전문

비온 뒤 고인 물웅덩이를 보면
흙탕물이 마침내 골목의 눈동자라는 생각
풀썩이는 도시 사막의
목마름이 불러낸 눈물방울이라는 생각

헛디뎌 진흙탕을 밟았더니 고인 물이 벌컥, 화를 낸다
눈동자까지 시뻘개져서는―

흙탕물이 도한 흙탕물인 것은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
의심이 많기 때문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삿대질하는 그대여
하 많은 거짓과 사기와 협잡이
그토록 딱딱한 데스 마스크로 만들고 말았구나

흙탕 가라앉는 물웅덩이 앞에 쭈그려 앉아 들여다본다
말갛게 핏발 삭히고 있는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본다

한사코 튀어나가려는 흙먼지를 눈물방울이 자꾸 달랜다
어두워져 가는 늙은 골목의 눈동자가
왈칵, 한번 더 흐려진다



도시의 흙탕물 물웅덩이도 가만히 있으면 맑아진다. 하늘과 구름이 비치고 물비늘이 생긴다. <헛디뎌 흙탕물을 밟았더니 고인 물이 벌컥, 화를 낸다>고 시인은 쓰고 있다. 흙먼지 고인 물웅덩이는 얼마나 예민한 눈동자인가? 유치환의 「깃발」을 패러디하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아, 누구던가? 이렇게도 맑고 여린 눈동자를 맨 처음 물웅덩이에 담을 줄을 안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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