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일그러진 이념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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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 거리에서 권위있게 차를 몰려면 평소 발성 연습부터 해둬야 한다. 접촉사고가 발생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기 때문이다.

행여 상대가 교통법규라도 따지려 들면 "왜 건방지게 반말이야" 하는 식으로 분쟁의 초점을 바꾸는 것이 정석이다. 이러한 투쟁지향적인 분쟁해결 방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 보편화한 지 오래다.

***말꼬리 잡는 토론 출연자

세상이 이러니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의 행태 역시 다를 바 없다. 민생 걱정이나 정책 논쟁보다 육박전이나 줄서기에 능한 사람들이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정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어휘를 보면 조폭 수준에 가깝다.

그래도 지식인들은 좀 다르겠지 하고 텔레비전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채널을 돌리면 위안은커녕 울화가 치민다. 자기 논리로 남을 설득하기보다 상대방의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출연자들 때문이다. '저 정도의 말싸움이라면 나도 하겠다' 고 느끼는 시청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요즘 들어 의약분업.남북문제.재벌규제.교육개혁.언론개혁 등 사회문제를 둘러싸고 온 세상이 싸움판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걱정은 어느 한 쪽을 편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좌익' 이니 '수구분자' 니 하는 딱지가 붙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쟁의 대상이 대부분 민생이나 시민권과 관련된 것인데도 일반 시민이나 다수의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싸움꾼들만 신명나게 설쳐대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애들 싸움판에서 편을 든다는 것은 핏줄과 양심의 문제다. 내 자식이 잘못했는데도 편들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양식있는 사람들은 자식을 나무란다. 사회문제로 갈등이 벌어지면 이념과 논리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논리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치를 의미한다. 반면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가치판단을 수반하는 주관적 문제이므로 사람에 따라 정답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근거해 정당한 이념대결을 벌이는 것은 민주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념이 다른 상대를 논리로 공박할 수는 있지만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색깔론들을 보면 논리 대결은 사라지고 획일화된 편가르기만 난무하고 있다. 이념이 다르다고 욕지거리부터 해댄다면 제 자식이라고 무조건 편드는 부모와 뭐가 다른가.

자칭 진보나 보수의 선봉을 칭하며 여론몰이에 나서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내용이 공허한 경우가 다반사다. 개혁을 내세우면 진보고, 시장원리를 강조하면 보수로 몰아치는 정도의 수준에서 제대로 된 이념논쟁이 이뤄질 리 없다.

필자와 같이 시장원리도 강조하며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속한다는 것인가. 이념을 제대로 내세우려면 논리부터 갖춰야 한다. 논리가 부족하니 목소리나 키우며 색깔론으로 분쟁의 초점을 바꾸려 드는 것이다.

의약분업의 경우 정책 실패를 탓할 수는 있어도 집권당 복지정책의 진보성에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울 수는 없다.

정부의 재벌정책을 비판한다고 수구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곤란하다. 경제적 효율성에 근거해 남북 경협을 비판해도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성장기반을 다지기 위한 구조개혁을 강조하면 불순분자로 도색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색깔싸움은 지지 못받아

도대체 언론개혁이 이념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생결단하듯 편을 갈라 색깔싸움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념이란 거창한 것 같아도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현 정부의 개혁이 흔들리는 것은 이념적인 저항 탓이 아니라 정책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야당의 지지도가 크게 오르지 않는 것은 수권정당다운 정책 청사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무조사를 받는 신문들도 언론의 자율성에 초점을 두어야지 보수필진을 동원해 색깔싸움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만 좁힐 뿐이다.

논리 없는 주장, 상대를 부인하는 이념논쟁으로는 침묵하는 다수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 언론이건 정당이건 당장 손해인 듯 보여도 길바닥 투쟁논리에서 먼저 벗어나는 측이 이기게 돼 있는 게임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경제학)

***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5미국 예일대 교수.

▶미국 NBER 교수연구위원, 세제발전심의위원.

*** 저서

자본시장개방과 조세정책, 개방시대의 시장경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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