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이 소년 조심하세요, 움직이는 지진이에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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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나는 지진이다
마르탱 파주 지음
강미란 옮김, 톡
84쪽, 8800원

소년이 지진이란다. 소년이 어떤 곳에 들어가면 그곳에 있는 액자나 물컵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다. 또 벽은 움직이고, 천장의 석고 조각이 우르르 떨어진다. 병원에 갔다. “이 아이는 지진인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진단했다.

웬 황당한 설정인가 싶다. 하지만 이야기는 마치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흘러간다. 소년의 집에선 대책을 세웠다. 가구들을 모조리 바닥에 고정시켰고, 땅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은 테이프·풀·끈으로 잘 붙여놓았다. 시청에도 알렸다. 시 전체에 “이 소년을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저자 마르탱 파주는 기발한 발상과 유머·역설 등이 특징으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다. 복통의 원인이 뱃속에 사는 5.2미터짜리 백상어 때문이라는 식(전작 『완벽한 하루』)의 역설적인 상황을 즐긴다. 원근법을 과감하게 무시한 추상화를 볼 때처럼, 신선하지만 어렵다.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상징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수다. 책에서 지진이란 삶의 상처가 남긴 후유증이다. 주인공 소년은 전쟁으로 친부모를 잃고 먼 나라로 입양됐다. 그 상처가 아이를 지진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공포로, 때로는 분노의 형태로 삶을 흔들어내는 지진이다. 하지만 지진을 없앨 수는 없다. 지질학자는 “지진은 비나 광합성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지진의 필요성까지 역설했다. “대륙이 만들어진 것도 지진 덕분”이라면서다. 좌절의 경험이나 상실의 아픔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인생의 교훈을 전하는 대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를 입고, 그 상처 때문에 지진이 된다. 그러나 지진이 삶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책은 물을 그 해결책으로 내놨다. 나에겐 무엇이 ‘물’이 돼 줄 것인가. 이야기는 짧지만 생각거리는 많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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