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흥망 숨어있는 얼굴은 하나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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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얼굴을 통해 표현하려 했다는 강현두씨. [김형수 기자]

언론학자 출신으로 화가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강현두(73) 서울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과). 그가 14~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법정 스님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의 생전 모습,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장면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인물화를 비롯한 수채화 51점이 전시된다. 2007년 첫 개인전 이후 2년반 동안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언론학자 출신이라는 것을 못 속이겠더군요. 역사적 기록, 사회 문제에 대한 저널리즘적 관심이 결국 사람으로 모였습니다. TV라는 작은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의 요체가 결국 사람의 얼굴 표정이듯, 사람의 얼굴 안에는 온갖 비극과 흥망이 숨어있죠. 눈·표정·근육이 모두 기호고요, 얼굴은 하나의 세계, 즉 소우주입니다.”

유명인 외에도 위안부 할머니, 북한 어린이, 중국 노동자, 남미 원주민, 남아공의 흑인 등 다양한 얼굴을 통해 다채로운 세상의 풍경화를 그린 셈이다. “위안부 할머니는 매주 집회 현장에 나가 만나고 관찰했죠. 세계 곳곳에서 만난 일반인들에게 그림 허락을 받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은 사진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법정의 인물화는 스님과 함께 오디오북 낭송작업을 해 친분이 두터웠던 부인 김세원씨(성우)의 덕이 컸다. 청을 넣자 기꺼이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고매한 스님이지만 강인한 무인의 이미지가 느껴졌습니다. 아내는 인자한 분을 왜 이렇게 강하게 그렸느냐고 타박이지만요. 전시회 뒤로 미루다가 생전에 그림을 전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정작 그는 가톨릭 신자이다. 정진석 추기경의 인물화는 2008년 말 그가 추기경에게 직접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무녀 김금화씨도 모델이 됐다.

뉴욕 작업실에서 걸어나오는 고 백남준씨를 그린 그림은, 원래 김세원씨와 같이 찍은 사진에서 김씨만 빼버렸다. “평소 마당발인 아내 덕을 많이 봤죠. 함께 여행하며 그림 감을 찾는 것도 아내가 더 열성적이었어요.” 그는 부인 김씨를 “이번 전시회의 산파이자 공동주최자, 화가의 길을 걷게 한 진정한 조력자”로 꼽았다.

강 교수의 화가 변신은 은퇴 뒤의 삶을 고민하는 주변 동료에게 모델이 되고 있다. 서울대 교수, 스카이라이프 사장 등 공직을 마무리한 뒤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에서 주부들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 처음엔 학생들에게 강사로 오해받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였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미술적 재능을 얘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의 태도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퇴임 뒤 삶을 살아야 하는 고령화시대인데, 저는 일단 저지르라고 충고합니다. 과거 내가 누구였든가는 전혀 중요치 않고, 그저 새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만이 중요할 뿐이지요.”

미술평론가 장준석씨는 그의 그림에 대해 “사실적인 그림을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이를 근간으로 예술성 있는 그림을 꾸준히 그려내고 있다”며 “수채화다운 맛이 있으면서 개성과 자존감이 흐른다”고 평했다.

올해로 그림에 도전한 것이 10년째. 매일 여섯 시간씩 붓을 잡는다. 다음 전시 때에는 기존의 수채화에서 벗어나 소재를 넓히겠다는 의욕도 보인다. 전시회장 02-399-1163.

글=양성희 기자 ,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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