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곡언아권'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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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시대에 같이 살면서도 통역이 필요한 얄궂은 세상이다. '언론개혁' 이란 말이 단적인 예다.

언론개혁은 우리 시대의 언론상황에 존재하는 폐습과 나쁜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일부의 언론 및 시민단체가 말하는 요즘의 언론개혁은 대체로 '빅3' 로 대표되는 신문사 체제를 자기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뜯어 고치자는 것으로 번안해도 될 것 같다.

***사주가 배제된 편집위원회

공교롭게도 빅3는 모두 사주가 있고, 권력에 비판적인 신문사다. 사주는 지금 악의 화신인 양 그들로부터 저주받는 형세에 처해 있다. 추미애라는 한 국회의원이 한 신문사의 기자에게 "이 사주 같은 놈" 이라고 악담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 국회의원과 여권을 포함한 '언론개혁세력' 은 빅3 신문사로부터 사주를 들어내고, 그들 유(類)의 논조를 따르도록 하는 듯한 것을 이른바 언론개혁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보는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체제에도 명암이 있듯이 신문과 방송에서 사주의 존재는 긍정적.부정적 측면이 있다. 사주가 보도의 공정성 확보에 걸림돌이 된다면 언론계 스스로 그 부분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앙일보가 사주가 배제된 편집위원회를 도입,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것이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사주와 경영상의 비리가 문제된다면 그것대로 합법적으로 처리하면 된다.

물론 지금과는 달리 정치적 의도가 배제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언론토양이 더 건전해지고 맑아진다면 사주나 그 구성원들도 군소리 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언론개혁의 미명하에 벌어지는 움직임이 빅3 탄압을 위한 굿판에 불과하다는 의혹은 언론계 내부, 권력과 언론의 관계 및 그 생리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 정권이 들어선 이후 폭로된 몇몇 언론관련 문건은 뭘 의미하는가. 최근 벌어지는 사태는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모사꾼들이 그 문건들 속에서 모두 제시한 내용이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오직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은 권력측과, 그에 추수해 반사이익을 얻고자 하는 부류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국론분열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언론 고유의 기능인 비판성을 보인 빅3에 비난을 쏟아붓는 군상들의 자화상을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진다. 방송은 김대중대통령이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한 후 여러 차례 언론개혁 토론회를 기획, 방영했다.

그러나 방송이 권력으로부터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개혁방안을 주제로 삼은 토론회는 거의 없었다. 일부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인들 보도의 편향성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결코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KBS방송노조의 한 구성원이 오늘의 이런 단면을 적확하게 힐난했을 것이다. KBS노보에 따르면 그는 중앙.조선.동아일보는 '수구언론' , KBS등 공영방송은 '주구(走狗)언론' ,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일부 신문을 '들러리 언론' 으로 규정한 후 주구언론들이 "이제는 언론개혁의 첨병을 자처하고 있다" 고 진단했다.

이른바 주구언론과 일부 들러리 언론이 어느 날 '진공상태' 에서 뛰쳐나온 순백의 인간처럼 행세하는 듯한 자세는 또다른 충성경쟁을 보는 듯하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보는 듯해서 안쓰럽기조차 하다. 일종의 곡언아권(曲言阿權)이라 할 만하다.

***들러리 언론의 충성 경쟁

언론개혁을 또다른 쪽에서 주도하는 일부 시민단체들이 빅3에만 화살을 주로 겨누는 듯한 점도 괴이하지 않은가. 방송의 보도 자세는 언론개혁의 대상이 아니라는 함의를 주고 있다. 논조의 또다른 편향성을 보인 신문사들도 공세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공정성이 최대의 무기여야 할 시민운동의 성격을 일탈해도 한참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가 권력의 사주를 받은 홍위병이 난동했던 중국 문화대혁명시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물론 빅3에도 부끄러운 과거의 얼룩이 있다. 자성하고 개혁해야 한다. '곡언아권' 으로부터의 해방도 언론개혁의 목표여야 한다.

이수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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