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77> 진흙과 연꽃은 한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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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풍경 2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이죠. 법정 스님도 생전에 이 게송을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연꽃’ 을 언급하네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숱한 수행자들이 이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데 참 흥미롭네요. ‘진흙’과 ‘연꽃’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진흙을 싫어합니다. 진흙은 가까이하면 곤란한 대상, 피해야 할 대상, 고통스러운 대상입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죠. 대신 연꽃은 무척 좋아합니다. 정갈하고,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이죠. 게다가 불가(佛家)에서 연꽃은 ‘깨달음의 상징이잖아요. 결국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내리더군요. “진흙은 싫고 연꽃은 좋다.”

이걸 ‘화중생연’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죠. “불길은 싫지만 연꽃은 좋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죠. “나는 불길이 싫어. 나는 연꽃만 원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선 결코 연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찬찬히 살펴 보세요. 연의 꽃대가 어디에서 올라오나요? 그렇습니다. 화중생연, 불길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숫타니파타』에 기록된 붓다의 게송도 마찬가지죠.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진흙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그걸 아주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힘들고, 지치고, 가슴 아프게 하는 내 삶의 고통이 과연 불길인가. 쉬지 않고 나를 볶아대는 일상의 스트레스가 과연 진흙인가. 불길이 진정 불길인가, 진흙이 정말 진흙인가. 그걸 꿰뚫어야 합니다. 그럼 알게 되죠. 진흙이 있어서 연꽃이 올라오고, 불꽃이 있어서 연꽃이 피는 걸 말입니다.

결국 둘이 아닌 거죠. 불꽃도 꽃이고, 연꽃도 꽃이니까요. 둘 다 내 마음의 꽃이죠. 실은 하나의 꽃인데 내가 엉뚱한 오해의 시선으로 보면 불꽃이 되고, 바른 이해의 시선으로 보면 연꽃이 되는 거죠. 그러니 “나는 진흙이 싫어, 연꽃만 좋아”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진흙과 연꽃을 둘로 나누는 나의 오해, 나의 착각을 걷어내면 그만이죠.

그걸 걷으면 답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왜 소리에 놀라지 않는지 말이죠. 연꽃이 왜 진흙에 물들지 않는지 말이죠. 바람이 왜 그물에 걸리지 않는지 말이죠. 거기에 답할 때 우리의 생활도 고요하고, 맑고, 자유로워질 테니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놀라지 않고, 물들지 않고, 걸리지 않을 테니 말이죠.

그 답이 뭘까요? 연꽃이 물 위에 뜨기 때문도 아니고, 사자의 심장이 커서도 아니고, 바람의 살결이 부드러워서도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소리와 사자, 진흙과 연꽃, 그물과 바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모두가 내가 만든 ‘꽃’이니까요.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죠. 나와 상대를 하나로 보면 놀람도 없고, 물듦도 없고, 걸림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때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보고, 연꽃 속에서 진흙을 보는 거죠. 진흙과 연꽃이 한몸이니까요. 그걸 두고 붓다는 “번뇌가 보리(깨달음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버거워하는 번뇌의 무게가 실은 지혜의 무게인 거죠. 절망하지 마세요.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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