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남주 '농부의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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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두둑 우두두두둑

느닷없이 한밤중에 쏘내기 쏟아지고

잠귀 밝은 할머니 젤 먼저 들어

소리친다

비 온다 아그들아 내다봐라

웃통바람 애비는 가래 들고 들로

속곳바람 에미는 멍석 말아 헛간으로

눈 비비고 손주놈은 소 몰아 마구간으로

아 여름밤 쏘내기여 고단한 농부의 잠이여.

- 김남주(1946~1994) '농부의 밤'

한여름밤, 고단한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한 농가가 소나기에 놀라 깨어 한바탕 북새통 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에서 가장 재미스런 대목은 할머니의 호령에 놀라 후다닥 마당으로 쏟아져 나와 가래 들고 뛰고 멍석 말아 얹고 소 몰아 마구간으로 내닫는, 아직 잠이 덜 깬 식구들의 어릿한 표정들이다.

그러나 소나기란 것이 원래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말짱하게 개게 마련이라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사람들은 정작 간밤의 소동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농가의 여름잠은 달다.

이시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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