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트 '뇌사'상태] 중동의 앞날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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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입원 중인 프랑스 파리 근교의 군병원 입구에 놓인 대형 초상화 앞에 한 소녀가 4일 촛불을 밝히고 있다.[클라마르 로이터=연합]

중동지역 정세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해졌다. 팔레스타인의 정파 간 갈등과 충돌은 거세지고 이.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아라파트의 퇴장과 이스라엘의 강경정책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장기집권 중인 대부분의 중동국가는 심각한 내부 도전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라파트가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세대교체 압력이 커지는데다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의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 확실한 후계자 없어=가장 긴박한 문제는 팔레스타인의 내부문제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아라파트는 2인자를 키우지 않았다. 아흐마드 쿠라이 총리가 일단 팔레스타인 정국을 이끌겠지만 과격세력은커녕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 주도권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아라파트는 자치정부의 총리라도 임명하라는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려 허수아비 총리를 임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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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직전에 지목한 세명의 공동 지도체제(압바스 전 총리, 쿠라이 현 총리, 알자아눈 자치의회 의장)에 대한 팔레스타인 정파들의 지지도 약하다. 자치정부의 주요 정파인 알파타 출신이자 아라파트의 측근이었던 세명에 대해 소장파 개혁주의자들은 퇴진을 요구해왔다. 40여년간 집권한 이들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반발이다. 10억달러 이상인 것으로 알려진 아라파트의 비자금을 둘러싼 갈등도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현재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포진한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 무장.정치세력의 도전이다. 이곳 무장단체와 주민의 상당수는 이미 수년 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제권을 벗어났다. 이들은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점차 멀어지고 이스라엘의 공세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불안한 이스라엘=이스라엘도 한동안 어려운 시간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실반 샬롬 이스라엘 외무장관도 아라파트가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자치정부의 붕괴와 함께 과격세력의 선동으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도 걱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지난달 28일 아라파트의 1차 의식불명 당시부터 대책 마련을 고심해 왔다. 이스라엘은 특히 지도부 부재를 틈타 정국을 장악하려는 과격세력들의 준동을 예상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이스라엘 공격에 나서거나 온건파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을 무력으로 장악할 것이란 예측이다. 주도권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종 무장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이스라엘과 과격단체 간 전면적인 피의 대결을 우려케 하는 이유다.

◆ 아랍권에 튀는 불똥=아라파트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증오와 대립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다. 자치정부가 들어선 이래 지난 10년간 아랍 각국의 정권은 '팔레스타인 사태 해결에 노력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아라파트에 전가할 수 있었다. 일부 국가는 아라파트의 지나친 권력욕 때문에 이.팔 분쟁의 해결이 어렵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라파트가 없어진 지금 아랍권은 '아랍의 적' 이스라엘과 화해냐 대립이냐를 분명히 선택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정책에 국가적 대책을 세우라는 국민과 야당의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자'고 주장해온 과격 이슬람 단체들의 활동도 더욱 강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랍 각국에서 반미.반이스라엘 투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팔 사태에 무능력하게 대응해 온 정부를 직접 공격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아랍권은 팔레스타인 내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를 진압하는 이스라엘군을 공격하기 위해 자국 군대를 파병하자는 주장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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