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기도시집' 중 '순례의 서' 부분
나의 주여, 당신은 그 성자들을 아시나이까?
밀폐된 수도원의 골방마저도
웃음소리, 고함소리와 너무 가깝다고 여겨
땅속 깊이 파고들어가 몸을 숨긴 이들을?
저마다 하나씩 불빛을 들고
동굴의 적은 공기를 호흡하였으며,
나이와 얼굴도 잊고
창 없는 집처럼 살았으며
오래전에 죽은 듯 더 이상 죽지도 않았습니다.
책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책마다 서리가
기어든 듯 모든 것이 이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도사 옷이 그들의 뼈에 간신히 걸쳐 있듯이
의미도 낱말마다 고드름처럼 겨우 매달려 있었습니다.
깜깜한 동굴에서 서로 몸이 부딪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여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시간은 느려질 만큼 느려져 나이나 얼굴을 모두 잊을 정도다. 삶의 의미는 작아질 만큼 작아져 더 이상 삶을 괴롭힐 수 없을 정도다. 죽음과는 친해질 만큼 친해져 죽음이 옆에 와도 왔는지 모를 정도다.
김기택<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