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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재배 장려해 민족의식 심은 남궁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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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무궁화 심기 운동을 펼쳐 1만 그루의 어린 나무를 이 땅 곳곳에 심고, 『동사략(東史略)』(1924), 『조선이야기』(1929)를 써서 민족의 혼과 역사를 지킨 무궁화 할아버지 남궁억.

국망(國亡)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을 통해 구국 언론활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1863~1939).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1907년 4월 종로 YMCA 강당에 모인 젊은이들의 가슴에 그는 희망의 불씨를 댕겼다. 일제에 나라를 앗기자 그는 “왜장의 노복이 되어 울 수 없는 닭이 되기보다 차라리 산간유곡에 학교를 세워 조선독립의 기초를 굳히는” 쪽을 택했다.

1918년 배화학당과 청년학원에서 8년간 잡았던 교편을 놓고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온 그는 모곡(牟谷)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에 준비하는 교육과 계몽활동에 온몸을 던졌다.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역사와 정신마저 앗으려 했던 황민화 정책이 가시화되던 1933년 말에 그는 갇힌 몸이 되었다.

“남궁억은 일한병합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경영하는 모곡학교를 이용하여 장래에 자기가 주장하는 주의의 토대를 구축하려고 생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불온한 역사 및 창가를 가르치고, 혹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언동을 하여 무고한 아동에게 독립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나아가 일반민에 대해서도 무궁화 재배를 장려하고 불온한 역사책도 만들어 발매하면서 전적으로 민족의식의 주입 고취에 전념하고 있다.”(‘범죄보고’, 1933.11.5) 그때 일제의 수사기록은 그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를 잘 요약한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곧 금일(今日)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그때 나라꽃 무궁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는 그의 교정 속 교실마다 청년들은 풍금소리에 맞춰 ‘일하러 가세’ ‘무궁화 삼천리’ ‘철 잃은 나비’와 같은 창가(唱歌)를 목청껏 부르며 우리 역사를 배웠다.

“태극기를 내가 평소에 숭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에게 일제는 “전적으로 민족사상에 굳어져 있어 개전(改悛)의 가망이 없다”는 딱지를 붙였다. 1년3개월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그는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귀천(歸天)했다. 1945년 다시 빛을 찾은 이 땅의 곳곳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뛰놀던 아이들의 가슴속 깊이 그가 목숨 바쳐 심어놓은 어린 나무들이 활짝 꽃을 피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